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한국 과학기술이 BTS처럼 되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우일 한국과총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이우일 한국과총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코로나19 와중에 오랜만에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미국에서 대한민국 기업의 제품을 보며 한국인으로서 새삼 긍지를 느꼈다. BTS로 대표되는 한류 문화의 존재감도 대단했다. 동시에 과학기술로는 왜 세계를 선도하지 못하는지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과학자로서 자성하면서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한류 스타가 되려면 수년간 뼈를 깎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이돌이 되기 위한 경쟁 와중에 다수는 중도에 탈락하고 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 과학기술 관련 연구는 성공률이 100%에 가깝다. ‘하기만 하면’ 성공이 사실상 보장되는 시스템에 안주하다 보니 세계를 선도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지원하되 간섭 안 하는 문화정책
과기 예산 지원 시스템 달라져야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은 ‘빠른 추격자(Fast-Follower)’ 전략의 성공 덕분이다. 추격 대상을 선정하고 일사불란한 체제로 남보다 신속하게 모방해 따라잡는 전략이다. 이런 전략에 따라 정부는 투자 대상 기술을 해마다 선정하고 전략을 세워 연구개발(R&D) 예산을 나눠준다. 마치 정답을 아는 문제를 푸는 것처럼 성공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차츰 우리가 맨 앞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방의 대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혹시 존재하더라도 우리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나라는 우리가 쉽게 모방하도록 더는 놔두지 않는다. 이젠 ‘빠른 추격자’에서 ‘선도자(First-Mover)’로 탈바꿈해야 할 때가 됐다. 이런 패러다임 전환을 지적한 지가 오래됐지만, 이렇다 할 변화를 구현하지 못한 건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4차산업 혁명의 디지털 대전환이 세계적 산업 환경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은 선도자와 추격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낯선 변화다. 그러나 전체의 위기는 준비된 자에게 패러다임을 바꿀 기회를 줄 것이다.

한국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 기조는 인프라만 마련해주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 같은 콘텐트 제작에 정부가 시시콜콜 간섭했다면 지구촌이 열광한 K드라마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학기술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정부가 연구 목표를 정하고 진행 과정을 일일이 점검하는 시스템에서는 세계를 선도하는 창의적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

단일 기관으로 세계 최다 노벨상 수상자(22명)를 배출한 독일 막스 플랑크(Max Planck) 연구소에는 운영 원칙이 있다. ‘정부는 연구비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충실히 실현되고 있는 막스 플랑크를 향해 세계 과학자들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춘 창의적 연구의 산실이라며 입을 모은다.

오는 9일 대선에서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차기 정부에 주어질 큰 소명 중 하나는 과학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을 전략 수립과 실행이다. 무한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지원시스템 혁신에 전략의 핵심을 조준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고, 자율과 도전 정신에 기반을 둔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지금껏 과학기술 지원 정책의 화두는 R&D 예산 규모였다. 하지만 앞으로 예산 투입 효과와 창의적 결과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운용 시스템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선도자로서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든다는 것은 예측 불가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성공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연구자의 시간이 관료의 시간과 다름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혁신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전환점에 선 대한민국의 새 지도자는 과학기술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미래 비전을 갖춰야 한다. 혁신은 제대로 된 원칙 하나만으로도 실현할 수 있다. 연구자가 혁신의 씨앗을 마음껏 심을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새 정부에서 과학기술 정책의 중심이 되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우일 한국과총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