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일이다. 세계적인 바이러스 유행으로 수많은 활동이 제약받는데 이것만큼은 더 도드라지고 더 다양해졌다. 바로 사람들의 소비 활동이다. 언택트소비·명품열풍·보복소비·가치소비…. 이 답답한 시국에 어떻게 하면 하루·주말·휴가·계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 소비는 그 어느 때보다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잘 쓰고 잘살고 있는 걸까. 새해, 김난도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장을 만나 사회의 변화, 이와 함께하는 소비 흐름을 짚어봤다. 김 교수는 2008년 말부터 동료 저자들과 신년 소비 트렌드를 전망·분석한 『트렌드 코리아』를 발간하고 있는데, 서점가에 이 책이 나오면 새해가 머지않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내 대표 트렌드 보고서로 자리 잡았다.
- 요즘같이 ‘트렌드’ 란 말이 많았던 때가 있나 싶다. 배경이 뭘까.
- “사회변화의 속도가 빨라져서다. 트렌드는 변화에 대한 담론이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집 전화와 삐삐를 썼지 휴대폰은 흔치 않았다. 비디오 가게가 성행했는데 갑자기 모두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QR코드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썼나. 거의 모든 산업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 소비 트렌드도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
- “옷장에 옷이 있는데 왜 새 옷을 살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소비의 가장 큰 동력은 ‘남과의 비교’다. 예전엔 비교할 대상을 볼 방법이 TV 정도였는데, 인스타그램·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등장하면서 이제 ‘만인 대 만인의 비교’가 가능해졌다. 자연스럽게 트렌드도 시시각각 변할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SNS의 등장을 “소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SNS로 유명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트렌드를 쫓을 경우 즉각적으로 ‘인정’받아 소비를 더욱 부추기기 때문이다.
- SNS로 인정받는단 게 무슨 뜻인가.
- “사람, 특히 젊은이들에 ‘인정받는’ 건 매우 중요하다. 과거엔 그 인정을 뭔가 어려운 일을 성취해서 얻으려 했다면 지금은 SNS의 ‘좋아요’ 숫자로 대체하게 됐다. 오늘 ‘좋아요’를 15개 받으면 오늘의 인정은 15개가 되는 거다. 이렇게 빠르고 쉽게 인정 욕구가 채워지기 때문에 미래보다 현재를 위해 살고,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현재의 행복을 최우선시하며 소비하는 태도)나 소확행(작지만 확실하게 실현가능한 행복)을 지향하게 됐다.”
- 욜로나 소확행이 나쁜 건가.
- “학자로서 현상은 그 자체로 인정해야지 가치판단을 해선 안 된다. 다만 미국의 투자 대가 워런 버핏이 2005년 주주 연례 서한에서 국가 빚 증가를 걱정하며 ‘미국이 주인이 아닌 소작농의 나라가 돼 가고 있다’고 지적한 게 떠오른다. 일례로 월급통장은 원래 월급날 직전에 바닥났다가 월급날 다시 채워진다. 그런데 요즘은 신용카드사용액, 대출상환 등으로 월급 첫날에 잔고가 0이 된다. 행복을 미리 다 당겨서 쓰는 거다. 지금 우리 소비가 그런 식이 되는 것 같다.”
- 명품열풍도 비교나 인정심리와 관련이 있을까.
- “한국은 옛날부터 사회적 비교가 굉장히 강하다. 인구밀도가 높고 지인과 함께 사는 문화라 그렇다. 신분제가 강했다가 무너진 뒤 경제성장이 빠른 나라들에서 명품 수요가 강한데 한국·중국·러시아·베트남 등이 대표적이다. 신분이 보이지 않는 잉크라면 명품과 부는 보이는 잉크다. 한국인은 신분상승 욕구가 크고 경쟁의식이 강해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증후군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한국의 명품 소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급증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해외여행 등에 쓰지 못한 돈을 사치재에 쓰는 ‘보복소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외부요인으로 억눌렸던 소비가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있단 얘기다.
- 보복하면서 할 만큼 소비가 중요한 걸까.
- “갈수록 소비가 본질적인 문제가 돼 가고 있다. 소비는 현대인의 도락이 됐다. 과거엔 직접 축구를 했다면 지금은 축구경기를 관전하며 소비한다. 해외여행에서도 색다른 것을 구경하고 먹고 쇼핑하며 논다. 소비만한 놀이가 없는데 놀이를 못 하게 하니까 보복소비가 나오는 거다. 이 밖에도 영화나 음악, 꽃 등을 구독하면서 최신 트렌드를 배우고 남에게 자랑하며 소통한다. 소비를 통해 나를 표현하고 그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드러낸다. 정치조차 세세하게 따져 구매(투표)하고 맘에 안 들면 리콜하려고 한다. 모든 것이 소비화하는 시대다.”
김 교수는 2022년을 포함해 앞으로 계속될 소비 트렌드로 ‘양극화’와 ‘개인화’를 꼽았다. 여기서 양극화는 빈익빈 부익부가 아니라 같은 사람, 같은 세대 안에서 일어나는 양극화다. 어중간한 것을 사지 않고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자랑할 만한 것을 산다든지, 명품을 사기 위해 생필품은 초저가품을 산다든지 하는 현상이 일상화할 것으로 봤다.
특히 개인화는 집단 문화가 강했던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트렌드다. 김 교수는 이를 극소단위로 파편화된 ‘나노사회’라고 표현했다.
- 코로나가 끝나면 공동체 문화가 부활하지 않을까.
- “문화충격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다가 2년이 흐르면 적응을 마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새로운 문화라면 이제 회식·결혼식·돌잔치 등 집단문화로 돌아가기 힘들 거다. 특히 고립된 사회에서 살아남다 보니 ‘나’가 굉장히 중요해졌다. 요즘 MBTI 등 온갖 테스트들이 많은 것도 ‘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한국은 그동안 주변 관계 속에서 나를 파악했고 음주도 관계에 대한 투자였다. 취향을 무시한 3000㏄ 맥주 피처로 폭탄주를 만들어 나눠 먹는 건 ‘우리는 하나’ 라는 의식이었다. 이미 대학가에 맥주 피처가 사라졌다.”
- 기업들도 변하지 않으면 소비자를 잡을 수 없겠다.
- “특히 오래된 대기업들이 그렇다. 다행히 최근 젊은 회장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디지털 전환이나 고객경험 강조 등 혁신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장보기’ 기능을 하던 대형마트에 ‘쇼핑’, 즉 놀이와 연관된 와인숍을 만든 게 좋은 예다. 기업의 혁신 방향은 더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나음’에서 경쟁자와 차별화하는 ‘다름’으로 흘러왔는데, 앞으론 ‘가장 나다움’을 만족시키는 ‘다움’이 핵심이 될 거다.”
- 코로나가 여전하고 변화는 빠르다. 어떻게 소비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 “자율주행차 등 기술의 발전으로 변화는 더 빨라지면 빨라졌지 느려지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누구인지, 내 직업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정체성을 규정하기 매우 어려운 시대가 됐다. 행복하려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들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하고 싶다. 지금은 너무 과시와 쇼핑, 소비에 올인하고 있다. 더 다양한 곳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되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