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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신으로 생식기 때려 죽였다...숯장수 축살한 일본인 발뺌[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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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 내셔널팀장의 픽: 성냥 1개 탓에 숨진 숯장수 

일제강점기인 1927년 10월 17일 오후 3시. 경남 울산군 언양면의 장터에 숯장수 김경도(34)씨가 숯을 지고 나타납니다. 그는 일본인 가리야(刈屋益槌, 53)의 가게에 숯을 판 뒤 “성냥을 하나 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가리야의 부인은 “돈을 주고 사라”며 단번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녀는 “돈이 없으니 담뱃불 댕기게 성냥 한 개만 달라”는 김씨의 말에 일본말로 욕설까지 내뱉습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자 가게 주인인 가리야가 뛰쳐나왔답니다. 그는 다짜고짜 김씨의 뺨을 때리고 밀어뜨린 뒤 나무신(게타,下駄)을 신은 발로 김씨를 가격합니다. 당시 생식기 주변을 맞은 김씨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답니다.

김씨의 가족은 이튿날 언양면에 있는 일본인 의사 하야시다(林田)를 부릅니다. 왕진을 나온 그는 발로 차인 곳에 약을 바르고, 소변을 빼내더니 “걱정할 거 없다”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울산대곡박물관 영상 캡쳐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울산대곡박물관 영상 캡쳐

발로 차인 숯장수…5일 뒤 사망

의사가 돌아간 뒤 김씨의 상태는 더욱 악화됩니다. 하루 뒤 다시 하야시다를 불렀지만, 그는 “염려할 거 없다”며 또다시 소변만 빼냈다고 합니다.

이에 김씨의 형은 “가리야를 고소할 테니 진단서를 끊어 달라”고 말합니다. 의사 하야시다는 “고소할 게 뭐 있냐, 병은 나을 거고 약값과 생활비는 가리야가 낼 것”이라며 말렸지만 결국 10원을 주고 진단서를 끊게 됩니다.

가리야는 김씨 가족이 자신을 고소하려고 진단서를 발급받았다는 소식에 겁을 먹었답니다. “치료비와 가족 생활비 등을 전부 부담할 테니 고소는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까지 합니다. 아울러 “김씨 집까지 거리가 멀어 의사 왕진이 어려우니 언양면에서 방을 한 칸을 빌려 지내라”며 선심도 씁니다.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사진 울산대곡박물관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사진 울산대곡박물관

경찰 출동하자 범행 발뺌…주민들 분노

김씨 형은 사건 발생 5일 뒤인 10월 22일 언양 주재소(駐在所)에 가리야를 고소합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김씨는 결국 사망했다고 합니다.

동생의 죽음을 본 김씨 형은 분노하며 가리야에게로 달려갑니다. 이에 가리야는 도리어 “자신을 폭행한다”는 이유로 김씨 형을 주재소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었거든 시신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김씨의 형은 동생의 시신을 가리야의 집으로 가져다 놓은 뒤 그를 붙잡아 두게 됩니다. 하지만 가리야는 출동한 경찰에게 “찬 일이 없다”고 발뺌을 했답니다. 이에 경찰은 복수의 민간의사 입회 아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차여서 죽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범행을 부인하던 가리야는 사건 발생 6일 뒤인 10월 23일 울산경찰서로 잡혀갑니다.

‘포악한 일본인, 조선인 때려죽여’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사진 울산대곡박물관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사진 울산대곡박물관

사건이 알려지자 지역 사회는 분노합니다. 당시 언론들은 ‘포악한 일본인, 조선인을 때려죽여’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냅니다. 이에 언양청년회는 총회를 열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공표할 것 등을 논의하고, 주민들 또한 사건 진상이 담긴 선전지 4000장을 뿌렸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리야가 어떤 법적 처벌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답니다. 그 당시 재판 결과가 담긴 판결문이나 언론 기사 등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건 발생 3개월여 뒤인 1928년 1월 27일 부산일보에 ‘가리야에게 징역 5년을 구형, 판결은 오는 31일’이라는 기사가 마지막 자료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가리야는 사건 8년 뒤인 1935년 가족과 함께 언양을 떠났다고만 전해집니다. 이런 내용은 최근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전시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재구성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당시 성냥. 사진 울산대곡박물관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응답하라 1927 언양 사건' 당시 성냥. 사진 울산대곡박물관

박물관 측은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고민을 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장날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사망 사건인지, 민족 차별로 다뤄야 하는 문제인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를 두고 유수관울산대곡박물관 전시해설사는 “사망 후 의사의 잘못된 진단이나 가리야의 처벌 과정은 민족 차별이며 지역 주민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고 말합니다.

권용대 울산대곡박물관 관장의 말을 들으면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일제 강점기에 사회단체와 주민, 언론 모두가 한마음으로 맞서 싸운 사건이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란 것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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