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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테슬라 국내매출 날렸다...비대면의 역설, 목소리 믿어버린 죄 [목소리 사기, 7000억 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살 만큼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죽으라는 얘기 같았어요.”
시중 은행 대출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속아 4000만원을 사기당한 60대 남성 A씨. 극단적인 선택까지 떠올렸던 심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동안은 수면제 없이 잠도 못 잤다”고도 했다.

전셋집을 옮겨야 해서 돈은 필요한데 가족에게 말하기 부끄러웠던 순간에 ‘그들’이 접근했다. 지난 4월 주거래 은행 명의로 ‘한정적으로 대출을 해준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피해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대출 상담 직후 은행에서 온 챗톡

알았으면 당했겠는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은 허무하게 당한 뒤 심한 자책감에 빠지게 된다. 이미 익숙해진 비대면 소통, 언택트(untact) 시대의 일상을 보이스피싱 일당은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은행 대출 상담을 받은 뒤 바로 그 은행 명의의 챗톡이 피해자에게 전해진 식이다.

도대체 왜, 어떤 방식으로 당했는지, 중앙일보가 피해자 63명의 얘기를 들어봤다. 보이스피싱예방협회와 함께 한 달간(10월 28일~11월 28일) 설문 조사를 통해서다. 설문에 참여한 40대 피해 여성은 “은행에서 대출상담을 받고 나왔는데 바로 그 은행이라고 챗톡이 왔다. 직원이 은행 앞으로 나온다고 했고, ‘신분증이 제대로 복사가 안 됐다’며 신분증까지 요구했다”고 했다. 이 여성은 신분증을 건네고 1350만원의 현금 편취를 당했다.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언택트 사회에 접속된 당신은 이미 ‘먹잇감’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최초 접근 수단은 문자(25명)와 전화(25명)가 가장 많았다(각각 39.7%). 모바일 메신저를 포함한 SNS는 17.5%(11명)였다.
사기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을 사용하거나, 인터넷에 연결된 누군가가 있다면 사기를 칠 수 있게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언택트 사회의 구성원 누구나 먹잇감인 셈이다.『사기의 세계』를 공저한 서준배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사기꾼들 입장에선 아주 경제적인 사업이다. 외국에 있으니까 잡힐 염려가 없고, 문자나 전화통화 요금은 싸다. 그런 면에서 보이스피싱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고 활개 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대면의 역설…목소리를 더 믿는다

비대면 사회는 역설적으로 목소리에 대한 신뢰감을 높였다. 대면 소통에서는 상대방의 얼굴과 표정을 보면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만, 언택트 사회에서는 그 기능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전화로 “당신 명의로 개설된 대포 통장이 범죄에 이용됐다”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게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설문에 답변한 피해자들이 검찰이나 금융감독원 등 기관 사칭(22명, 34.9%), 저금리 또는 대환대출 유도(19명, 30.2%), 가족·지인 사칭을 통한 자금이체 유도(8명, 12.7%) 등에 속은 것도 그런 이유다.

보이스피싱 피해 유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피해 유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사이버범죄연구회장을 맡고 있는 정완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심각한 상황이라면서 접근을 해오면 일단 당황할 수밖에 없고, 당황하다 보면 범인들이 원하는 쪽으로 대화가 흘러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저만 해도 이렇게 연구를 하고 있지만, 갑자기 ‘검은 목소리’가 들려오면 굉장히 당황스러울 것 같다”고 했다.

‘비대면의 역설’은 2006년 5월 한국에서 첫 피해 사례가 보고된 보이스피싱이 15년 넘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로 자리 잡고 있다. 경찰청은 올해 연말 보이스피싱 피해금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지난해 7000억원을 갱신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가 지난해 국내에서 올린 매출(7162억)을 뛰어넘을 것이란 얘기다.

보이스피싱 자금 전달까지 걸린 시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자금 전달까지 걸린 시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컨빈서’ 앞에 “나는 안 당한다” 장담 못 해

보이스피싱 범죄에서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피해자의 잘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경찰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은 연령대별로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의심을 해소시켜 확신을 주는 여러 형태의 물적·심리적 기망행위(컨빈서ㆍconvincer)가 작동한다. 일반인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니 당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 세 차례에 걸쳐 ‘박석용 검사’ 사칭범에게 5500만원을 뜯긴 30대 초반의 남성 직장인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는 장면을 보면서 ‘설마 나한테 저런 일이 일어나겠어’라고 했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내가 당했다. 저한테 스스로 화가 많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히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사기를 당하고 나니 그제야 경각심을 느끼고 ‘불감증’이라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추가 피해 여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추가 피해 여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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