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값싸도 욕먹고 너무 비싸면 구설수/추석인사(정치와 돈:2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주간연재/멸치 등 지역 특산품 인기
해마다 추석 때가 다가오면 여의도 의원회관에는 밤마다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들로 붐빈다.
이때문에 긴급한 용무로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을 찾는 사람들도 괜스레 눈치가 보여 방앞에서 쭈뼛거리기 일쑤다. 설 또는 추석을 10일정도 앞두고부터는 아예 의원회관을 찾지 않는 것이 예의요 불문율이다.
그러나 의원들이라고 받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양의 선물을 지역구에 뿌려야 하고 인사를 차려야 할 곳은 빠뜨리지 않고 챙기는 것도 「유능한」 국회의원이 가져야 할 필수요건이다.
자연히 보좌관 등 비서진들의 발걸음도 바빠질 수밖에 없다.
선물을 보내야 할 곳을 챙기고 백화점의 선물용품 캐털로그를 수집,물품을 선정하며 심할 경우 직접 배달에 나서기도 한다.
보내야 할 곳이 많다보니 값이 싸야하지만 생활수준이 높아져 웬만한 선물은 오히려 욕만 먹는다. 그렇다고 너무 비싼 선물은 구설수에 오른다.
값이 싸면서도 받는 쪽에서 기분좋아 할 선물,이런 물품을 선정하기 위해 보좌관들은 이방 저방 기웃거리며 아이디어를 구하게 된다.
이런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한 것은 김영삼 민자당 대표.
정당생활을 한 사람치고 김 대표의 멸치선물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김 대표의 비서진들도 언제부터 멸치선물을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지못할 정도로 「멸치」하면 김 대표의 전용선물이 돼버렸다.
김 대표의 정치초년병 시절에는 거제도에서 선주였던 김 대표의 아버지가 보내주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두트럭분만 현지에서 실어오고 나머지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등에서 구입한다.
박희태 민자당 대변인도 지역구(남해) 탓에 김 대표의 뒤를 이어 지난해부터 멸치를 선물하고 있다.
오한구 의원의 영양 고추,최영철 노동장관의 목포 미역,심명보ㆍ최재욱 의원의 참기름,김현욱 의원의 어리굴젓,이긍규 의원의 서산 김 등도 나름대로 유명하며 김덕룡 의원도 올해부터 마늘을 선물로 채택했다.
내륙출신은 고추ㆍ마늘 등 농산물,해안지방은 김ㆍ젓갈 등 해산물을 선물하는 것이 점차 관례화되고 있는 추세다.
농수산물은 지역구의 특산품을 팔아주면서 받는 사람에게는 지역 특성을 분명히 인식시켜줄 수 있는 호재다. 가격도 1만∼3만원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방법도 여러가지다. 민자당의 K의원은 강원도 산지에서 직접 송이버섯을 사들여 절반 이상의 비용을 아꼈으며 S의원은 친지로부터 그릇 등을 직접 제공받기도 했다. 들어오는 선물을 포장을 벗겨내고 재포장해 다른 곳에 돌리는 「교통정리」를 잘하는 것도 자금부족을 느끼는 초선의원들이 애용하는 수법이다.
지역구에 뿌려지는 선물은 주로 2천∼3천원대의 찬합ㆍ쟁반ㆍ교자상 등의 생활용품과 양말ㆍ넥타이ㆍ비누 등 생필품이 주종을 이룬다.
이치호ㆍ정동성ㆍ황병우 의원 등은 시가 5천∼6천원짜리 찬합을 원가로 2천∼4천개씩 주문,지구당에 내려보냈고 김종식 의원은 넥타이ㆍ스카프를 지구당 차원에서 자체 조달했다. 여기에 드는 비용만도 4백만∼1천만원이나 된다.
여당의 경우 추석선물비는 지구당 선물을 제외해도 최저 5백만원은 필요하다는 얘기며 자금사정이 넉넉한 의원들은 5천만∼1억원까지 뿌리는 등 자금동원 능력과 수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여당의 경우 줄잡아 20억∼50억원이 추석자금으로 풀려나가는 셈이다.
김동주 의원의 경우 지역구인 경남 양산에 가을운동회 선물을 겸해 5백원짜리 플래스틱 자 4만개를 초ㆍ중ㆍ고교생과 교사들에게 배포했다 하니 이것만도 2천만원에 달한다.
민자당은 지난 24일 의원세미나 때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이 주는 격려비(속칭 오리발)를 시ㆍ도당 위원장을 통해 이미 지급했고 김영삼ㆍ김종필ㆍ박태준 최고위원 등이 각각 계파별로 소속의원들에게 「떡값」을 푼 것으로 알려져 2백만∼5백만원의 실탄이 지급됐다고 보면 비교적 추석 자금부담은 덜 느끼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정부의 추석선물 안주고 안받기운동에 입법부 차원에서 협조한다는 당의 방침이 정해져 의원들간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당간부ㆍ중진들은 의원들에게 선물을 돌렸는데 박준규 국회의장은 옥돔을,김재광 부의장은 젓갈을 선물했으며 손주항 평민당 부총재는 청주 2병씩을 여야의원들에게 모두 보냈다.
정부의 방침 때문에 의원회관으로 보내는 선물도 줄었지만 선물을 보낼 곳도 대폭 줄었다고 의원들은 주장한다.
이종찬 의원의 경우 3천원짜리 비누ㆍ치약세트 1천개를 지역구내 양로원과 영세민들에게 나눠주고 수해지역에 트레이닝 5백벌을 보내는 것으로 추석선물을 끝냈다고 한다.
박준규 국회의장은 해마다 각계인사 5,6천명에 보내던 것을 올해는 대폭 줄여 5백명선에서 마무리했다.
평민당 등 야당의 경우 의원직 사퇴서 제출로 세비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다 국정감사까지 못하고 있어 「인사」 오는데가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이런 의원들의 사정을 감안,의원에게는 2백만원,원외 위원장에게는 60만원의 떡값을 전달했으며 이기택 민주당 총재도 26일 원외 위원장들에게 지구당 운영보조비 명목으로 50만원식 지급했다.
사정이 어려운 것을 지역구에서도 알아 지나친 요구는 하지 않지만 조금씩이라도 하지 않고 지나가기는 어렵다고 야당의원들은 울상이다.
유인학 의원은 1천4백원짜리 허리띠 4천개를,정대철ㆍ한광옥 의원은 코피잔과 튀김그릇을 각각 3백∼5백세트씩 마련했고 이기택 총재와 김정길 의원도 양말과 비누 등을 준비,지구당원과 고아원 등에 선물했다.
윗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뇌물성」으로 인식되지만 아랫사람에게 하는 선물은 미덕으로까지 간주되는 우리사회의 풍토 때문에 정치권에서의 선물 안주고 안받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김두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