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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도시재생 롤모델? ‘월세전단’ 어지러운 이화벽화마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8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에는 훼손되고 빛 바랜 벽화를 여럿 볼 수 있었다. 윤정주 인턴기자

18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에는 훼손되고 빛 바랜 벽화를 여럿 볼 수 있었다. 윤정주 인턴기자

지난 18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이화동으로 향하는 길목에 접어들자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림의 상태는 온전치 못했다. 벽화 곳곳엔 패이고 갈라진 자국이 선명했다. 낙서가 빼곡한 벽면 한쪽에는 세입자를 구하는 전단도 붙었다. 검게 때가 탄 벽화에 마을지도와 함께 새겨진 ‘이화동 벽화마을’이란 글자가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한때 도시재생의 성공사례였지만...

18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이화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마을 지도 그려진 벽화. 검은 얼룩이 끼는 등 훼손이 심해 벽화마을 글자도 일부 지워진 모습이다. 윤정주 인턴기자

18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이화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마을 지도 그려진 벽화. 검은 얼룩이 끼는 등 훼손이 심해 벽화마을 글자도 일부 지워진 모습이다. 윤정주 인턴기자

서울의 대표적인 벽화마을로 손꼽히던 이화벽화마을이 벽화의 유지를 둘러싸고 이른바 ‘진퇴양난’에 빠졌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도시재생의 성공사례로도 손꼽았던 곳이지만 벽화가 방치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다. 관광객의 유입을 위해서 벽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한편, 오세훈 서울시장의 취임 이후 재개발을 희망하는 주민들 사이에선 벽화가 걸림돌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관할 구청은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날 기자가 찾은 이화동 벽화마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외부인의 발길이 끊겨 정적이 감돌았다. 외벽이 주황색과 분홍색으로 채색된 상가건물은 유리창 너머로 빈 곳을 드러내며 공실임을 알려줬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는 널브러진 공사 자재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했다. 3년 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재개발이 무산된 이화동은 마을 도로 정비 등 주거환경 개선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곳곳에 쳐진 울타리로 벽화가 아예 가려진 곳도 있었다.

18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 낙서가 빼곡한 오래된 벽면 한쪽에 세입자를 구하는 전단이 붙어 있다. 윤정주 인턴기자

18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 낙서가 빼곡한 오래된 벽면 한쪽에 세입자를 구하는 전단이 붙어 있다. 윤정주 인턴기자

관광객 위해 보존해야 vs 재개발에 걸림돌

18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 내 한 공실상가의 모습. 코로나19로 인해 관광객이 줄면서 이화벽화마을의 소상공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윤정주 인턴기자

18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 내 한 공실상가의 모습. 코로나19로 인해 관광객이 줄면서 이화벽화마을의 소상공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윤정주 인턴기자

마을 주민들은 어수선한 마을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화동에만 38년 살았다는 김모(58)씨는 “요즘에는 마을에 통 사람들이 안 온다”며 “동네에 가게 놓으러 왔던 젊은 외지인들이 장사가 안돼서 많이 이사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자영업자는 “손님들이 가게에 와서 ‘벽화가 있어야 하는데 왜 없냐’고 묻는다”며 “손님들에게는 ‘요즘에는 (벽화를) 없애는 추세’라고 둘러댄다”고 말했다. 마을의 한 슈퍼마켓 주인은 “벽화가 있어야 좀 사람들도 오고 마을에 활력이 생겨서 좋은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화동의 벽화는 마을 주민 간 갈등의 원인이기도 했다. 지난 2016년 일부 주민이 지나친 관광객 유입으로 생활이 불편해졌다며 벽화를 훼손해 다른 주민이 해당 주민들을 고소하는 등 갈등이 불거지면서다. 이후에도 마을에는 벽화로 인해 생활이 불편하다는 의견과 마을 경제를 위해 벽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갈라져 갈등이 지속했다.

18일 낮 11시 낙산공원에서 이화동으로 가는 길목에 설치된 난간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는 모습. 윤정주 인턴기자

18일 낮 11시 낙산공원에서 이화동으로 가는 길목에 설치된 난간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는 모습. 윤정주 인턴기자

최근에는 코로나19로 관광객 발길이 줄고 벽화마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서 마을 재개발을 다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상황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재개발로 다른 지역의 집값이 많이 오르고 시장님도 바뀌다 보니 최근 재개발이 다시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며 “성곽 인근에 자리 잡은 이화동은 문화재 보존 등으로 재개발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여전히 이를 원하는 주민분들의 의견이 나온다”고 말했다.

불확실한 벽화의 운명, “주민 의사 존중해야”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에는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주거환경개선 공사로 인해 벽화 인근에 공사 펜스가 설치됐다. 윤정주 인턴기자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에는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주거환경개선 공사로 인해 벽화 인근에 공사 펜스가 설치됐다. 윤정주 인턴기자

벽화 유지를 두고 주민 간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관할 구청은 다소 애매한 입장을 내놓고 있다. 종로구청 주거재생과 관계자는 “올해 들어 공문서에서도 벽화마을 대신 성곽마을이라 표기하는 등 벽화마을은 점점 없애는 추세”라며 “집마다 벽화를 칠하고 마는 것은 주민 개인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반면 도시디자인과 관계자는 “본래 벽화는 문체부에서 소유하고 관리하다가 올해 5월부터 종로구가 권한을 인계받았다”며 “주민 의견에 따라 올 하반기부터 벽화별로 유지·보수 또는 철거에 나설 것”이라 말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이화동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든 최대한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최근희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마을의 미래에 대한 결정은 협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주민과 지자체가 협의를 통해 어떤 방향으로 갈 건지 결정해야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도하면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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