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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인 이근배|조식 남명학 출처시의 종가 산천 재·덕천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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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리산은 예사로운 산이 아니다. 이 나라 모진 역사의 비바람을 이겨내면서도 끓어 넘치는 정기를 나누어 좋은 산과 착한 물을 이 땅에 넉넉하게 키우며 살아왔다. 산과 물뿐이랴. 큰산은 으레 큰 사람을 낳았으니 지리산이 오랜 세월 태몽을 꾸고 산고를 치러 낳은 한 사람이 곧 남명조 식이다.
백두산이 흘러 내려오다 더 갈곳이 없어 우뚝 멈춰 섰다고 하여 두류산으로 불리던 지리산. 신선들이 노니는 선계가 있다 하여 봉래산(금강산)·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꼽히던 지리산이 사람을 맞으려고 꾸민 것이 덕산과 덕 천이었다.
남명은 두 류의 뜻을 알았다. 그래서 60평생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펼치고 뿌리내릴 땅을 고르다 두류산이 내보낸 덕산을 등에 지고 덕천을 안고서 산천 재를 지었다. 그리고 여기서 퇴계 학과 한 짝의 구슬이 되는 남명학을 완성시킨 것이다.

<퇴계와 쌍벽 이뤄>
남명학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시키고 학문적 체계를 세웠을 뿐 아니라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실행학문이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교」와「의」를 사람이 살아가는 실천강령으로 삼고 반궁체험과 지경실행을 주창하였으며 남명 스스로가 자신의 학문적 이론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 왔음에 더욱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출처란 사람이 나아가고 물러감을 뜻하는 말이다. 조선조의 큰선비들은 남명이 출처의 곧고 바른 길을 걸었음에 입을 모아 칭송을 했다. 퇴계는 「출처가 분명해서 옛 성현을 닮았다」고 했고, 허 목은「구차하게 굽히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가볍게 쓰이기를 거부했고 홀로 우뚝 서 있었다」고 그의 출처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퇴계 등 고학들의 천거와 명종·선조 등 임금 등의 부름을 십여 차례나 받고도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던 남명의 출처는 무엇이던가. 그의 사상과 인간적 연민이 담긴 한편의 시조는 세월이 흘러도 쩌렁쩌렁한 울림으로 겨레의 가슴에 살아 있다.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다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여기서「베옷」과「암혈」은 청빈과 은둔을 뜻한다. 「구름 낀 볕 뉘」는 임금의 은총, 곧 벼슬을 말함인데 명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해」에 비겨 자신의 심회를 읊은 것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명이 살아온 길을 더듬지 않을 수 없다.
남명은 경상우도 삼가현(현 합천군 삼가면)토끼마을의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를 지낸 서고형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다(1501년 6월25일). 우연히도 남명은 퇴계와 같은 해 태어났으니 그보다 꼭 다섯 달 먼저였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조선조초기의 명문인데다 남다른 총명과 천자를 타고난 남명인지라 입신양명은 불 본듯했고 남명도 동료를 위해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남보다 발빠른 출사의 길이 약속되고 있었던 남명이 하나의 계시를 얻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열아 홉 살 되던 해 산사에서 정진하고 있던 그에게 들려 온 소식은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것과 숙부 조??경도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수 침에게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천착하는 선비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던 차에 남명으로서는 부사의 길을 가겠다는 큰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남명의 신념은 쇳덩이처럼 굳게 다져져 있었다. 결코 관직을 맡지 않기로 마음먹었음에도 그에게 계속해서 직책이 제수 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사양을 하다가 그가 55세 되던 해 단성현감에 제수 되자 그는 명종에게 사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자신이 봉직할 수 없음을 탄원하면서도 당시 사회적 부조리와 정치의 난맥상등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어 그의 불꽃같은 기개와 투철한 사상의 실천적 자세를 읽게 된다.

<벼슬 한사코 사양>
그후 6년 뒤인 61세 때 남명은 바로 단성 현의 덕산 기슭에 산천 재를 짓는다. 물론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남명이 58세 때 쓴 지리산기행문인『유두류록』을 보면「내가 두류산에 오른 것은 덕산 동쪽으로 세번, 청학신응 동쪽으로 한번, 용유 동쪽으로 세번, 백운 동쪽으로 한번, 노루목 골로 한번이었다. 이것이 어찌 산과 물을 탐하여 번거로움을 거리끼고 할 수 있는 일인가. 백년의 계획이 있어 산의 한 폭을 얻어 늙음을 마칠 땅을 찾고자 함이었다』고 밝히고 있어 지리산을 열 번이나 답파하고 비로소 산천 재의 터를 골랐음을 알 수 있다.
두류산 양단 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능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이 시조에서도 남명이 지리산의 절경에 얼마나 혼을 주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그간 쓴 한시에서 지리산을 두고 쓴 시가 많이 있다.
「덕산계정」에 부쳐
보라 천석의 종을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
마치 지리산과 다투기라도 하듯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것을
「제덕산계정」
청간천석종 비대박무성
쟁사두류산 천명유부명
천석종은 큰그릇을 뜻하니
남명은 자기자신을 비유하면서 지리산과 더불어 맞서 보는 호기를 시에서 부리고 있다. 또「두류 작」에서는「훗날 내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타년명자야신간)」하고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신감을 내 비추기도 한다. 그의 시조와 한시의 세계는 이처럼 드높은 기상으로 앞을 탁 트이게 한다.
남명과 가장 가까웠던 성운이 묘갈명에서「말에 위엄이 있고 뜻이 같으며 운율의 법도가 가득 차 있다」고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남명은 그 스스로 시를 쓰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성수 침에게 보낸 편지에는「시는 사물을 즐기느라 그 뜻을 잃기도 하며 날로 교만스러워짐이 더하는 듯하여 시 쓰기는 버린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이는 시의 본질에 대한 견해라기보다는 자신의 시 재에 대한 반성으로 보이며 시가 기교에 치우쳐 사물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함을 나무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명은 비록 작은 편수이나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고 전해져 오는 한시만 해도 1백98수 가 되는 것을 미루어 독서를 하고 강 학을 하고 저술을 하는 틈틈이 시를 쓰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시「민암부」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백성의 주권을 소리높이 외치고 있으니「백성이 물이라고/예부 터 일러 왔다/백성이 임금을 받든다 하나/백성은 나라를 쓰러뜨리기도 한다」(민유수야 고유설야 민칙대군 민칙복국)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시를 통해 온몸으로 쏟고 있는 민본사상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사후 영의정 추도>
명종의 간곡한 부름을 끝내 뿌리치지 못해 66세 되던 해 명종과 마주앉아 왕도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이런 짧은 인연이「서산에 해지다 하니…」를 낳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맑고 푸른 지리산의 바람과 물도 사람의 수명 앞에는 할 일 없음인가. 퇴계와 동갑인 남명도 퇴계가 세상을 뜬 두 해 뒤인 선조5년(1572년)72세의 나이로 고 절한 한 생애를 마친다.
덕천서원은 사후 4년 뒤 산천 재와 가까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세워지고 광해군 7년에는 참봉벼슬 하나도 지낸 일이 없는 남명은 영의정에 추증 된다.
실천사상을 문하에서 배운 정인홍·김성일 등 많은 제자들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장으로 활약한 것도 남명 학문의 참모습을 비춰 주고 있다.
한가지 안타까운 일은 인조반정 때 정인홍이 대역죄로 몰리게 되어 그 화가 스승인 남명에게까지 미친 일이다. 『남명 집』이 훼판 되는 등 수난 당해 남명학의 계승도 그만큼 더뎠다.
가을 하늘처럼 드높은 사상을 지리산과 더불어 이 나라에 물려준 남명, 그 숨결을 들으러 지리산 가는 길을 묻는다. 산청 읍에서 30km로 중산이리 못 미 처에 차를 멈춘다. 산천 재와 덕천서원을 돌아보고 묘소에 참배한다.
동족상잔의 상처는 여기에도 깊이 새겨져 지리산 전투에서 입은 총탄을 맞은 비가 묘소밖에 쓰러져 있다. 반 천년 잠 못 드는 스승이시여. 오늘 이 겨레 갈 길도 가르쳐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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