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삼평 가문|유전 마을 도자기 명성 씨뿌린 "도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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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도자기는 그 시대의 삶을 담는 그릇으로 생활 양식에 따라 끊임없는 변천을 할 뿐 아니라 도공의 혼이 담긴 미적 감각의 대상으로서도 계속 변해간다.
일본에 간조선 도공들의 작품을 보면 1대 때는 그 쪽의 주문에 의해 만들었지만 기형이나 문양에서 오히려 조선자기의 선과 형의 느낌이 많이 나오고, 2대에 가면 조선 것도 아니면서 일본 것도 아닌 중간치 그릇이 되다가 3대쯤 가면 거의 일본 그릇 쪽으로 변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변화를 거듭한 일본자기가 지금 세계시장에서 고급 생활도자기로 손꼽히게 됐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여유 있는 계층은 일본자기에 매료돼 해마다 그 유명하다는 아리타(유전)산 생활도자기의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
우리가 전해준 도자기 기술을 역수출하고 있는 아리타 마을 언덕에는 다음과 같은 비석이 우뚝 서있어 세월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우리 도조 이삼평은 조선, 충청도의 금강 사람으로 우리 아리타의 도조 일뿐 아니라 일본도업계의 대 은인이다.』
아리타의 도공들은 오래 전 이 마을에 이삼평의 공덕비를 세웠을 뿐 아니라 그의 고향인 충남 공주 근방 금강에도 공덕비를 세우기 위해 지난 7월19일 기공식을 가졌고 오는 10월말께 완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 준공식에는 아리타의 도공 1백여 명이 직접 참석해 그들이 떠받드는 도조 이삼평의 넋을 4백년만에 고향 땅에 되 모시면서 그의 은덕을 기릴 예정.
규슈지방에는 우리나라에 이미 잘 알려진 14대 심수관을 비롯해 독창적인 도자 기술을 10대 이상 전승해온 조선도공의 후예인 도예가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자로 유명한 아리타의 13대 이삼평, 다카도리야키의 대가 후쿠오카현의 13대 팔산, 상감청자의 맥을 이어온 구마모토현의 11대 아가노, 분청의 일본 인간문화재인 사가 현의 13대 나카자토 가문을 방문, 일본에 끌려간 조선도공들의 삶의 흔적과 그 후손들의 근황을 알아봤다.
이삼평은 일본 도자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616년경 이삼평이 아리타에 와서 희고 단단한 자석광을 발견하여 조선에서 만들던 백자를 만듦으로써 일본에서도 경질자기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이삼평이 정착한 아리타는 후쿠오카에서 남서쪽으로 110㎞ 떨어진 산간마을로 산과 산사이의 긴 분지에 도자기 공장·도자기 상점·가족 공방·가마들이 모여있는 인구 2만 명의 도자기 마을이다. 이곳에는 도처에 이삼평과 연관된 사적들이 남아있다.
최초의 자석 발견장인 이즈미야마, 이삼평이 조선 도공과 함께 처음으로 자기를 구웠던 사적지 덴구타니요, 이삼평의 과거장(절에서 죽은 사람들의 속명·법명·사망 날짜 등 신상기록을 해둔 장부)이 있는 용천사와 묘지, 흰 조선 바지저고리에 상투를 튼 도조 이삼평의 모습을 백자로 만들어 진열해 놓은 아리타 자료관, 도산신사 등등….
조선도공과 이삼평에 관한 자료에 정통한 아리타 역사 민속 자료관의 학예원인 촌상씨는『1637년에 일본 도공 8백여 명이 추방되고 이삼평을 중심으로 한 조선도공들만으로 도자기요를 만들게 했다』는 아리타사의 기록과 그 밖의 이삼평 관련 자료를 보여주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기술적으로 일본도공보다 월등한 조선도공들이 아리타의 도자기산업을 이끌어가게 되었으며 여기 저기 분산되어 있던 가마를 한곳으로 모아 수출용 고급 이마리 자기를 만들게 했다. 그는 이삼평을 수출용 도자기를 굽는 그 일대 13개 가마를 총괄 지휘하던 중심인물로 보았다.
이때는 마침 중국이 내부사정으로 인해 유럽에서 요구하던 양만큼의 자기수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유럽상인들은 새로운 수입 선으로 일본을 택하게 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우수한 조선도공을 대량 확보한 일본은 아리타를 중심으로 별 어려움 없이 유럽에서 원했던 중국도자기를 대량으로 생산, 수출함으로써 아리타와 이마리 자기의 명성이 시작되었다.
이삼평은 20세 전후에 일본으로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6년에 이삼평의 묘가 아리타에서 발견되었고 그 이듬해인 1967년 1월12일 향토사학가가 문화재로 지정된 용천사 과거장을 읽다가 이삼평에 관한 기록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과거장의 내용과 비문의 내용이 일치해 이삼평이 79세로 이 마을에서 사망했음이 확인됐다.
용천사는 창건 4백50년 된 아리타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정원이 아름답고 건물도 잘 관리된 마을 속의 절이다.
이삼평의 묘가 있는 마을공동 묘지입구에는「이삼평 묘지입구」라는 표지판이 있어 이 묘지에 묻힌 사람 중 이삼평이 가장 중요인물로 취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풍상에 마모된 돌비석 옆에는「사적 초대 김>강삼병위 묘」라는 흰 팻말이 우뚝 서있어 수백개의 묘비 중에서도 금방 이삼평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비석 앞 제단에는 백자 잔이 놓여있고 주변에는 하얀 꽃이 피고 정돈도 잘돼있어 누군가 계속 돌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13대 이삼평이 살고있다.
그의 일본이름은 가네가에요시토(김?강의인).
그 옛날 조선 도공들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줄 때 거의 고향 지명을 성으로 달아주었다고 하는데 선조 이삼평은, 충남 공주 부근 금강을 고향이라고 했기 때문에 가네가에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올해 70세인 13대 이삼평은 옛 도공의 인품이 이랬을 듯 싶은 아주 순박하고 겸손한 할아버지였다.
몇 번에 걸친 개축과 신축을 거듭해가면서 선조 대대로 여기서 살아왔다는 이삼평의 집은 마당도 거의 없고 그리 넓지 않은 낡은 일본식 집인데 노부부와 외아들이 살고있다. 두서없이 세간살이가 널려있는 지극히 서민적인 생활 풍경 속에 요소 요소에 놓인 큼직한 백자그릇들이 집안의 품위를 유지시켜주고 있었다. 벽에는 한복 입은 여배우 달력과 KBS펜던트가 걸려있어 집주인이 한국과 인연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삼평의 명성을 듣고 멀리 한국에서 취재 왔다는 말을 듣고는『저는 도공으로서 20년간 외도를 했기 때문에 조상님들께 면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며 오히려 송구스러워 했다.
그는 2차 대전에 징병을 당했다 돌아와 철도청의 기관사로 20년간 일하다가 가업인 도공으로 돌아온지는 15년밖에 안 된다.
14대인 아들 쇼헤이(성평·30)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바람대로 철저한 도공수업을 쌓아와 이미 한 사람 몫의 도공 일은 훌륭하게 해내고 있지만 낮에는 직장에서 도예기술을 연마하고 밤에는 명망있는 도예가에게서 예술성을 지도 받고 와서는 아버지와 합작으로 선조 때부터 전수돼온 백자를 빚고 있다.
아리타에서는 매년 10월15일을 전후해 도조제가 열리는데 이때 13대 이삼평은 그가 보관하고 있는 이삼평에 관한 고문서들을 일반에게 공개하며 부인은 팥밥을 지어 제를 올린다.
13대 이삼평은『선조의 고향을 꼭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글 : 송성희(미소화랑 큐에이터) 사진 심민숙(서강대강사·사진작가)<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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