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생활에 쫓기다 어느덧 중년…못 이룬 꿈을 찾아 나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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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생활에 찌들고 무뎌진 나 자신을 어느 날 돌아보면서 여고시절 소설가를 꿈꾸며 밤을 밝혀 글을 쓰던 내가 왜 이 모양이 됐나 서글픈 생각이 들더군요.』
꿈이 흔적도 없이 깨져 가는 세월이 허망해 남편과 아이들 몰래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주부 김성희씨(45·서울 갈월동)는『잡지 독자투고란에 원고가 채택된 이후 이제는 당당하게 문학 소녀 시절의 꿈을 이루는 습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이렇듯 어렸을 때부터 키워왔던 가슴속의 갖가지 소망을 뒤늦게 나마 이루려는 주부들의 모습을 도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여류 문학인회가 해마다 5, 6월에 주최하는 주부백일장이 대표적인 예.
올해로 23회를 맞은 이 백일장에는 매년 전국에서 2백∼4백여 명의 주부들이 몰려오는데『그 중 30∼40%는 기필코 입선해 시인이나 수필가의 꿈에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각오로 매년 참가하고 있다』고 김지향 한국여류문학인회 부회장(한양여전 교수)은 전한다.
입선자들의 반 이상은 끈질긴 노력을 거듭해 결국 잡지 등을 통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있다는 것.
이들 참가자들의 60%가 30∼40대 주부이고 50대 이후도 10%이상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소녀시절의 꿈을 이루려는 뒤늦은 노력이 40∼50대 주부들에 의해 많이 시도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김 부회장은『생활의 경제적·시간적 여유증대와 함께 주부들의 자아의식이 강해지고, 또 성장한 자녀와 더욱 바빠지는 남편이 밖으로 돌면서 주부들이 고독과 소외감을 달래기 위해 그 동안 생활에 쫓겨 이루지 못한 일들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분석한다.
대한주부클럽 연합회도 신사임당의 날에 주부예능대회를 22년째 개최하고 있다.
『그 동안 이 대회 서예부문 입선자들의 모임인 묵향회 회원 4백여 명 중 매년 15∼20명이 공부를 계속해 국전 등 각종 굵직한 공모전에 입상하고 있다』고 이 모임의 신정희 회장 (61·서울 오륜동)은 말한다.
신 회장 역시 40대 이후 젊어서 하고 싶었던 서예공부에 정진해 지난 20년간 국전 서예부문 입선 6회, 특선 2회의 영광을 안았고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 활약중이다.
이같이 못 배우고 못 이룬 소망을 뒤늦게 나마 이뤄보겠다는 주부들이 크게 늘어나자 꿈을 실현케하는 갖가지 배움의 장소들이 줄을 이어 생겨나고 있다.
가난 등의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주부들을 위해 중·고교 과정을 가르쳐 주는 양원주부학교에는 82년 개교이후 2천5백여 명의 주부들이 못 배운 설움을 풀려고 거쳐갔다.
서울에는 이대·숙대·덕성여대 등 7개 대학이 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평생 교육원을 열고 있다.
매 학기 2천5백여 명의 여성이 등록하고 있는 덕성여대의 경우 30대말∼60대의 주부가 55%를 차지하고 있다.
신문사들이 운영하는 문화센터의 경우도 비슷하다. 중앙문화센터의 봄 학기 강좌 수강생 4천 명 중 여성이 72%이고 그중 30∼50대가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학예 업무부 강동일씨는 전했다.
이 문화센터의 고전 무용반 주부학생들은 오는 9월 9일 호암아트홀에서, 덕성여대 교육원 합창반주부들은 10월중 서울세종문화회관에서 각각 발표회를 가져 그 동안 바쁜 생활 속에 움츠러들었던 기량과 꿈을 마음껏 뽐낼 계획이다. <고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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