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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는 국가의 품위 … 지도자들이 먼저 훼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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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91년 10월 2일 열린 국무회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낱말 하나를 수정한다. 그때 법률 용어로 결정된 단어가 '갓길'이다. 그때만 해도 '노견(路肩)'이란 일본어가 쓰이고 있었고, 정부는 '노견'을 직역한 '길어깨'란 단어를 유통하려던 참이었다. 그걸 막아낸 이가 당시 문화부 장관 이어령(72)씨다.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 전국의 고속도로엔 '갓길'대신 '길어깨'란 말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의 등단 50주년 인터뷰는 15년 전의 일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건 일종의 상징적인 일화였다. 이어령이란 글쟁이의 창작 공간이 종이뿐만 아니라 나라의 행정과 여러 문화적 사건에도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업적이나 늘어놓는 식의 기념 인터뷰를 그는 사양했다. 대신 반세기 동안 글을 쓴 사람으로서 올바른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밝힐 의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생산한 허다한 기록과 신화처럼 전해오는 숱한 일화는 가급적 삼갔다. 현재 본사 고문으로 있는 그를, 노재현 문화스포츠 담당 에디터가 만났다.

-'갓길'이란 말도 선생의 창작품이란 걸 모르는 이가 많다.

"지금도 길 다니다 혼자 뿌듯해하고 그런다. 문화부 장관 때 '이벤트 장관'이라고 욕도 먹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칼럼 1000번 써도 못 고칠 걸 한번의 문화행정으로 이룬 것 같아 보람도 느낀다. '갓길'은 내 전집에 들어갈 수 없는 글쓰기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종이 위에 쓴 글이 아니라 공공의 장소에 쓴 글쓰기 말이다."

-등단 50년의 감회를 묻는다면.

"아쉬운 점부터 말하겠다. 말하자면 나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컴퓨터로 글을 쓴 작가다. 내 글쓰기 공간은 82년 원고지에서 액정 화면으로 이동했다. 한데 요즘 들어 너무 일렀던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든다. 컴퓨터에 글을 쓰는 건 모래 위나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처럼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종이에 쓰는 글쓰기는 한 번 쓰면 지울 수 없다는 점에서 진검승부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한 자 한 자에 대한 긴장도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잘했다 싶은 점이 있을 텐데.

"내가 다른 일을 한 게 아니라 바로 글을 썼다는 사실일 것이다. '홀로 독(獨)'이란 글자가 있다. 독재.독선.고독 따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어는 대체로 안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글쓰기에서는 다르다. 독창적이라고 할 때 이 '독'이 쓰인다. 이건 글쓰기 작업의 어떤 운명 같은 걸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글쟁이는 고독해야, 다시 말해 당파가 없어야 독창적인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단 생활 50년 동안 한번도 계파를 만들지 않은 건 바로 '홀로 독'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인가.

"나는 우상을 파괴하겠다며 문단에 들어섰다. 그랬던 내가 우상이 되면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50년 전 난 젊은 문학의 기수(旗手)로 불렸다. 그런데 기수란 게 무엇이냐. 전쟁터에서 적의 총탄에 제일 먼저 맞아 죽는 게 기수 아니냐. 앞장서겠다는 건, 희생을 감수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겸손한 의미로 나는 기수이고자 했다."

-글을 쓸 때 염두에 두는 게 있다면.

"내 글쓰기는 소위 장르를 뛰어넘는 글쓰기다. 내 글쓰기가 비평이 된 건 문단에 등장할 때 시와 소설은 신춘문예란 제도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비평만이 그와 같은 제도를 통과하지 않아도 됐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처럼 나에게 고통스러운 말은 없다. 소설의 갈증이 풀어지면 시에 대한 갈증, 희곡에 대한 갈증으로 내 글쓰기는 끊임없이 옮겨졌다. 내 글쓰기는 여러 우물을 파는 것이다. 지금도 글을 쓰는 건 아직도 새로운 글쓰기의 갈증이, 새 우물을 파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글쓰기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88올림픽 개막식 때 굴렁쇠를 굴리자고 제안했던 것도 나에겐 똑같은 의미였다. 내가 올림픽 개막식에 관여한 건 공연에까지 손을 뻗친 게 아니었다. 그것 또한 문학적 행위였다. 김영태 시인이 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쓴 시가 있다. 굴렁쇠 굴리는 걸 본 시인은, 풀밭에 쓴 가장 긴장되고 아름다운 일행시라고 노래했다. 내 의도가 바로 그러했다. 잠실의 광장, 그 초록색 원고지에 일행시를 쓴 것이었다. 88올림픽 개막식은 나에게 몇십 억원짜리의 호사스러운 글쓰기였다."

-요즘 인문학이 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인문학도 위기고, 공학도 위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성과 지식의 창조원이 마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과 창조력이 고갈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파당 의식이 가장 큰 문제다. 옛날에 과거 치다가 망한 게 우리나라다. 과거에서 모범답안을 못 써내면 출세를 못했다. 결국 획일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국문학도 사정이 비슷하다. 주례사인지 비평인지 모를 글이 요즘 우리 문학엔 너무 많다. 고전적 의미에서의 비평은 사라지고 해석만 남은 것 같다. 자유인이 아니면 올바른 비평을 할 수 없다."

-정치인들의 품위 없는 말과 글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제 때 다 잃은 것 같지만 잃지 않은 것도 있다. 바로 우리말이다. 우리에겐 두 개의 영토가 있다. 한반도라는 국토와 우리말이라는 언어의 영토다. 언어는 말하자면 나라의 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언어에는 아름다운 말과 속된 말이 있다. 두 개가 합쳐져 하나의 국어가 되는 것이다. 점잖은 말이 있기 때문에 상스러운 말도 탄력을 받는 것이다. 두 가지의 말 가운데 상스러운 말만 통용된다면 그건 국토의 상실을 의미한다. 고운 말을 쓰면 바보가 되고, 거친 말을 써야 어울리게 되는 건 전적으로 사회의 책임이다. 국어는 국가의 품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먼저 품위를 훼손하고 있다."

-글쓰기 교육에도 문제가 많은 것 아닌가.

"나 역시 요즘의 서울대 논술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없다. 명색이 50년 동안 글을 썼다는 나도 이런 방식의 글쓰기에는 자신이 없다. 다양성은 안 길러주고 논술지도란 명목으로 수십만 명에게 획일적인 글을 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획일화한 글쓰기 교육의 도도한 광풍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글쓰기 교육은 상상력과 창조력을 키우는 데 힘써야 한다.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어떠한 글쓰기가 좋은 글쓰기인가.

"제 생각을 쓰면 된다. 남의 생각을 자꾸 내 글에서 쓰려고 하니까 좋은 글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제 생각이 있다. 그걸 밝히는 용기만 있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제 생각이 없으면 감히 없다고 쓰고, 아무리 바보 같은 생각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충실히 옮긴다면 좋은 글의 자격은 일단 갖춘 것이다. 어휘가 부족하거나 논리가 약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만 쓴다면 독창성 있는 글쓰기가 될 수 있다. 글쓰기 작업이 황금이냐 배설물이냐의 차이는 독창성에 달려 있다."

-앞으로의 글쓰기 계획은.

"최근에 완간한 전집 30권은 문학이론서 등 사고의 체계에 관한 글은 뺀 것이다. 그것만 정리해도 열 권 정도가 될 것 같다. 이것 말고 펴내고 싶은 건 시집이다. 거기에서 내 글쓰기 인생 반세기를 정리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평론가.교수.칼럼니스트.장관 등 수많은 직업 가운데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크리에이터(creator)로 불리고 싶다. 광고 쪽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고, 크리에이터를 대문자로 시작하면 조물주를 뜻하기도 하지만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란 내 뜻에 가장 가까운 단어인 듯 싶다. 장관.교수.평론가 등 어떠한 직함도 나에겐 생소하고 어색하다. 그냥 선생으로 불렸을 때 마음이 가장 편하다."

정리=손민호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 이어령씨는

1956년 5월 6일자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란 글을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디딘다. 당시 문단의 '우상'이었던 백철.조연현.서정주.김동리 등을 맹렬히 비판한 글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60년대엔 김수영 시인과 '순수-참여 논쟁'을 일으켜 다시 주목을 받는다. 참여문학론을 옹호한 김수영 시인에 맞서 이어령씨는 문화 자체의 창조력 고양을 강조하는 순수문학론을 펼친다. 이 대립 구도는 아직도 유효하다.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90~91년)을 역임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이어령이란 이름은 그의 숱한 베스트셀러에 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63년), '축소지향의 일본인'(82년), '디지로그'(2006년) 등은 새로운 시대를 연 문제작으로 평가받는다. 공저.편저 등까지 합하면 저작 수가 130편이 넘는다. 최근 '이어령 라이브러리'(전 30권)가 완간됐지만, 앞으로 10권은 더 쓸 작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