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동호인의 벗 『옛 책 사랑』 사라진다|「헌책 명인」 공진석씨 세계… 여름호로 종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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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옛 책 사랑』.
표지에 서예가 윤석진씨의 예스런 한글궁체 로고넉자를 담고 국판 30쪽 안팎으로 옛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철마다 전해지던 작은 책.
드러나기엔 볼품도 없고 초라하지만 그 내용을 아는 이들에게는 옛 책과 얽힌 비슷한 경험을 함께 나누게 하고, 거기다 쏠쏠한 재미와 파적의 읽을거리를 주면서 언제 손에 들어도 정겹기만한 책이었다.
.그 『옛 책 사랑』이 90년 여름통권 8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리라는 소식이다.
2년여 동안 넉넉지 않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이 책을 꾸려오던 발행인 공운석씨가 올 여름 생각지도 않게 쓰러진 뒤 머나먼 유계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광화문 새문안 교회 건너편에서 「공씨 책방」이란 국내 최대의 헌책방을 경영하던 공씨는 지난 7월26일 오후 2시쯤 언제나처럼 변두리에서 책을 사 그 책짐을 들고 시내버스로 돌아오다 변을 당했다.
운전기사가 자는 듯이 좌석에 엎드려 있는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여서 의사들로서도 어떻게 써볼 계제가 못 되었다.
지병인 협심증의 순간발작으로 인한 심장마비가 사인이었다.
죽기 두달 전에도 예의 협심증으로 경희 의료원에 1주일 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고, 늘 알약을 품에 넣고 다니며 복용해왔다고는 하지만 그가 그처럼 쉽사리 세상을 버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51세, 한창 일할 나이였다.
사흘 뒤 그의 유해는 그가 생전에 마지막 꿈과 정열을 쏟아 부었던 광화문 「공씨 책방」을 돌아 벽제 화장으로 향했고 그 곳의 뜨거운 불 속에서 한줌 재가되었다. 『죽어선 정말이지 아무 자취도 남기고 싶지 않아요』라고 그는 늘 입버릇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공씨가 헌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스무살 되던 해인 1960년 길거리에서 덤핑 책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경남 창령이 고향인 그는 10남매 중 4남으로 그 무렵 자식 많은 집이 으레 그렇듯 지긋지긋한 가난에 쫓기며 살다 대구 계성 고등학교를 3학년 2학기 때 중퇴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덤핑 책장사 말고도 아이스케이크 장사, 쇼빵 (식빡) 장사, 미군부대 쓰레기하치장 인부, 열쇠 수리점 점원, 가정교사 등 닥치는 대로 궂은 직업을 전전하다가 큰형 (공진현·58)의 퇴직금을 밑천으로 66년 그는 마침내 휘경 시장 입구에 9평짜리 「하산 서점」이란 헌책방을 냈다. 덤핑 책 노점을 할 때 모아두었던 책 2천권을 갖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나카마 (책 중간상) 일을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하루 종일 고물상이나 변두리 책방을 돌며 싼값에 책을 거둬다 청계천 고서점가에 되넘기는 장사였다.
그후 회기동 동사무소 옆에 있는 대학 서점을 인수, 처제 최성장씨 (45)와 함께 헌책방을 경영하던 그가 고서의 메카라고 불리는 청계천으로 진출해간 것은 77년 봄.
우선 6가 쪽에 1·8평짜리 가게를 그때 돈 2백만원에 임대해 「대학 서점」이란 간판을 내걸었고 다시 이듬해에는 그 옆 가게까지 사들여 「대명 서점」이란 상호를 달았다.
공씨는 헌책을 사고 파는 일개 장사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돈에만 영혼을 매달려 하지 않았다.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는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그의 지적 편력은 그래서 웬만한 먹물꾼들이라면 오가는 말 몇마디로 손을 들어야할 만큼 넓고 깊었다. 손님이 찾는 책의 내용을 한 줄로 꿰고 그만큼 책을 골라내는 안목도 높아 사람들은 생전의 그를 이름대신 곧잘 「공 박사」란 별명으로 불렀다. 책방 걸음이 잦고 그의 유수한 단골이 가도 했던 남재희 의원 (민자) 같은 이는 『헌책에 관한한 공 선생은 가위 명인이요, 명인』이라며 그를 치켜세우곤 했다.
그는 글 솜씨도 남 못지 않아 젊어서부터 작가가 되는게 꿈이었다. 도하 각 일간 신문에 죽자살자 작품을 써보내고, 최종심에서라도 떨어지고 나면 1년 내내 그 상처로 울어야 하는 소위 신춘 문예 열병을 그는 60년대에 앓았다.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그의 「고서 주변」이 최우수작으로 당선된 것은 그런 맹목적 열병이 한참 수그러진 77년의 일이었다.
그가 교보문고 같은 「헌책방의 대형화」를 꿈꾸면서 청계천의 두 가게를 팔고 광화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85년10월. 1층과 지하를 합해 44평의 공간에 3만5천권의 책을 들여놓고 「공씨 책방」이란 상호로 문을 열었다. 『한번만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광화문의 개미귀신굴을 아십니까? 책을 사랑하시는 분은 광화문을 지나치실 때 공씨 책방을 조심하십시오.』 문을 열면서 그는 앞 우리 문에 이런 선전 문구를 내다 붙였다.
이듬해 6월 그는 고서 동호인들이 부담 없이 읽고 또 대화나 정보 교환의 양으로 이용할 수 있는 마땅한 지면을 마련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옛 책 사람』이란 계간지를 창간했다. 공씨 책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원고료 없이 글을 써 주었지만 경비는 물론이고 원고를 받아 마지막으로 책이 만들어져 나올 때까지의 모든 작업을 책방 일을 보며 틈틈이 그 혼자서 감당했다.
『헌책방에 외곬로 매달려 30년을 지냈는데도 한달 수입이 어지간한 기업의 대졸 초임 수준에도 못 미치는 60만원』이라고 개탄하던 그로써는 돈도 시간도 실은 너무 힘겨운 지출이었다.
그 『옛 책 사랑』에 공씨는 「옛책, 그 언저리에서」란 제목으로 자신의 글도 연재했다. 고서와 인연을 맺은 20대 때부터 그가 겪었던 주변의 이야기들을 풍자와 해학이 깃든 특유의 구수한 문체로 재미있게 풀어갔다.
『공씨의 글이 기다려진다』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책도 처음의 1천부에서 8호때는 2천5백부로 늘어났다.
죽기전 공씨는 새 재개발에 밀려 고아화문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기면서 제9호를 종간호로 『옛 책 사랑』을 일단 끝낼 생각이었던 것 같다. 미리 써놓은 『9월호를 내며』란 글에서 그는 『아홉수를 잘 넘기라는 속설이 있지만 이 「옛 책 사랑」이 제9호를 낼 즈음에 또 그 조짐이 도졌다』고 썼다.
바로 그 글에서 그는 또 『광화문 책방은 나의 운명이며 나의 모든 것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이주 동의서에 인감도장을 찍어주던 그 밤엔 또 어쩌자고 장대 같은 장마 비마저 주룩주룩 쏟아졌을까. 심장 전문의가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수로 술을 마신 채 밤새도록 책방 계단을 오르고 내리면서 나는 철부지 어린애 마냥 소리 높여 울었다』고도 썼다.
그러다 며칠 후 공씨는 비명에 갔다. 그의 한 동료는 그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디서 책이 나봤다 하면 집세와 아이들의 등록금까지 들고 뛰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철저한 장인 정신과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로 헌책 장사들의 자존심을 키웠습니다. 우리 업자들 세계에서 그만한 사람을 다시 얻기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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