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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강술래 닮은 풍년 춤 쌀 이는 조리는 「주르」라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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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중앙일보는 민속학회의 우리문화와 몽골문화 비교조사(7월25일∼8월10일)에 주기중 사진부기자를 동행시켜 현지 취재토록 했다.
몽골의 민속신앙과 민요·민속무용·신화와 전설·민속음악 등을 조사한 한국민속학회 회원은 임동권·정병호·김사풍(중앙대)·김태곤(경희대)·권오성(한양대) 교수.
몽골인들은 그 신체적 외모부터가 우리와 똑같고 문화도 아주 흡사한 부문이 많다.
중국인들은 몽고로 쓰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용맹하다는 뜻의 「몽골」(Mongol)로 부른다. 외몽고(몽골인민공화국)와 내몽고(중국자치구)의 각종 민속현장과 면면히 전승돼 오고 있는 전통문화 실태를 조사, 우리 문화와 비교 분석한 민속학회 회원들의 원고를 받아 주기자의 현장사진과 함께 매주 1회씩 연재한다. 【편집자주】
사막으로 뒤덮인 몽골은 가도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광막한 사막의 나라였다.
몽골의 땅 덩어리는 우리 나라의 여덟 배 넓이에 인구가 겨우 2백만 명인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군데군데 물이 있는 초원과 북쪽 고산지대의 극히 좁은 땅 뿐이었다.
몽골에 와서 눈으로 보는 놀라운 일은 몽골 족이 말이나 소·양떼를 몰고 다니며 주로 말 젖을 짜먹고 사는 유목생활이라서 농경으로 정착생활을 하는 우리와 살아가는 방법이 너무나 다른 데도 그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문화 속에는 분명히 한국의 민속과 일치하거나 유사한 점이 많아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몽골 어디를 가나 길옆과 구릉에 주먹만한 크기에서 목침 만한 크기의 돌멩이들을 둥그렇게 쌓아올린 「오보」(Ovoo)들의 돌무더기가 우리 나라 길 옆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서낭당의 돌무더기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유목민의 주거양식을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에 마침 오보에서 의식을 올리고 있는 몽골 인들을 만났다. 울란바토르 시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투딩훈디라는 곳의 길 옆 오보에서 등에 짐을 가득 실은 낙타의 고삐와 빈말 고삐를 한 손에 모아 잡고 오보의 돌무더기 주위를 돌며 땅 바닥에 흩어진 돌멩이를 주워 얹고 있었다. 일행중의 바쓰후라는 34세의 남자는 중앙고비사막에 살면서 양 2백67마리를 몰고 울란바토르까지 2백30㎞거리를 13일 동안에 와서 넘겨주고 돌아가는 길에 행로의 안전을 위해 오보에다 빈다고 했다. 오보의 돌무더기 위에 돈과 담배·차를 바치고 낙타와 말을 이끈 채 돌무더기 주위를 오른 쪽 방향으로 세 바퀴 돌며 땅에 흩어져 있는 돌멩이를 주워 얹고 행로가 안전하게 해 달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듯 빈다.
또 몽골에는 「홈체로」라고 부르는 한국의 석장성 같은 사람의 얼굴이 조각된 석상들이 여기지기 널려 있어 마치 우리 나라의 석장생을 옮겨다놓은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몽골의 동부사막 지대의 초이에 있는 석상들은 그 모양이 어쩌면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똑같아 마치제주도의 돌하루방을 이곳에 옮겨다 놓은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돌하루방 닮아>
제주도에 있는 조랑말이 몽골의 초원 어디에서나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사원이나 궁터에 앉아있는 돌로 조각된 해태상과 부르보토스흐하라고 하는 남녀 여러 명이 떼를 지어 밤에 군무로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은 한국의 강강술래와 왕궁 앞에 앉아 있는 해태 상을 연상케 해 전혀 낯설지 않다. 몽골인의 두 발과 복식, 연자방아 쟁기,
민구들이 한국의 것들과 생김새가 비슷하고 특히 곡식을 일 때 쓰는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서 얽어 만든 조리는 몽골 명칭으로 「주르」라 하여 발음까지 유사해 역시 낯설지 않다. 또 몽골 족의 전통 종교인 사만교(샤머니즘)도 한국의 무속과 계통을 같이 하는 강신 계통인데다 신이나 선대 사만의 영혼을 부를 때 사만이 입에 물고 부는 호르라는 기구가 있어 우리의 무속과 같은 색채를 더욱 뚜렷하게 해준다.
여기서 극히 개괄적으로 제한된 몇몇 사례의 동질성이나 유사성이 제기되었는데 그 해석문제는 역사학과 민속학·민족학·인류학적 시각에서 조심성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문화적 동질성이나 유사성은 우연하게도 몽골이나 한국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또 한민족의 이동경로를 따라 중앙아시아·몽골을 거쳐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이 두 지역에서 유사성 내지 동질성이 발견될 수도 있으며 그 역으로 문화교류에 따라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거나, 13세기로부터 시작되던 칭기즈칸의 판도로 보아 한족의 문화요소가 교류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몽골이 13세기초에 28년간 6∼7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고려를 함락시키고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지배하다시피 하면서 특히 제주도에 「탐라국 초토사」를 설치해 몽골 직할지로 삼으면서 목마장을 꾸며 놓았던 역사적 배경을 상기하면 주로 말 젖을 짜먹는 몽골 족에는 몽골 원산의 조랑말이 제주도에서도 필요했을 것이고, 제주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돌하루방의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면이 엿보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과거의 영광스럽던 몽골 족은 많이도 변했고, 또 많이 변해지려고 스스로 몸부림치고 있다. 13세기는 몽골 족이 세계사의 판도를 바꿔 놓았던 시기였다. 아시아대륙과 유럽 대륙을 송두리째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어쩌다가 그 역으로 한족에 합병되고 그것도 부족해 몽골의 한 허리 반을 잘라 중국과 소련이 각각 나누어가졌다. 그래서 내몽골과 외몽골이라는 명칭이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선명하게 떠오르게 되었다. 1921년에 젊은 강군 수케파트르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몽골을 독립시켰다. 그러나 독립 영웅 수케파토르는 까닭 없는 병으로 1923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지금은 민주광장에 그의 석상만 서있다. 사인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수케파토르는 지식인과 종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라마승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후문이 전해지고 있다.
그후 사회주의 혁명은 급진전되어 이 나라 수도의 명칭을 울가에서 울란바토르, 즉 「붉은 영웅」이란 의미로 바꾸고 1930년 후반기에는 지식인과 종교인을 합해 무려 10만 명을 처단하면서 전국에 퍼져 있던 라마교 사원 7백여 개를 모두 없애버렸다. 그러면서 몽골문자가 자취를 감추고 노어 문자가 공식 표기 문자로 등장해 지금도 발음은 몽골 어 발음을 그대로 쓰면서 표기는 노어 문자를 쓰고 있다.
두개로 갈라진 몽골. 내몽골인 남쪽 중국령에 가서는 몽골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일부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내몽골은 우선 언어가 중국어로 거의 통용되고 몽골 특유의 유목생활이 자취를 감추고 집단농장을 만들어 공동가옥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 내몽골 오지에 들어가면 집이라고 하는 것이 황토 흙으로 벽을 쌓아 창도 없이 일자 집으로 길게 짓고 한 칸씩 벽을 막아 한가족 6∼7명이 한 방에서 산다. 이렇게 지은 일자 집 한 채에 많으면 10여 가구, 작으면 5∼6가구가 살고 이 일자 집을 ㄷ자나 ㅁ자로 짓는데 따라 30, 40가구가 집단으로 살며 하나의 공동변소를 사용하게 된다. 이것은 중국 농촌어디서나 똑같은 모양이 발견되어 중국과 내몽골은 생활양식에 벌 차이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유목민 전통계승>
그러나 외몽골에 가면 내몽골에서 보던 한 문자에 몽골문자를 병기한 간판과는 대조적으로 노문자 일색의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서 도시 분위기가 북구의 어느 도시 일부 같은 느낌을 준다. 외몽골의 몇몇 지식인들에게 내·외몽골이 하나로 합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내몽골은 이미 중국화 되었기 때문에 관심 밖이라고 하면서 몽골의 정통은 외몽골, 즉 「몽골」이라고 했다.
이런 와중에도 한가지 다행한 것은 소련이 외몽골의 유목민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아 유목민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점이다. 하기야 강우량이 절대 부족이어서 농작물이 전혀 자랄 수 없기 때문에 내몽골과 같은 집단농장화가 불가능했을는지도 모른다. 밖에서 정치와 사회가 어떻게 되어가든 전혀 아랑곳없이 유목민들은 초원의 풀을 찾아 이곳 저곳 말떼와 양떼를 몰고 다니며 끼니때가 되면 말 젖이나 짜서 배고프지 않게 마시면 된다는 그 천진한 생각이 오늘날 몽골이 이렇게 쇠퇴 일로를 걷게된 원인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주기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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