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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명창' 김옥심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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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5년 만에 '바로잡습니다'를 쓴다. 기자는 2001년 9월 경기명창 지화자씨의 부음 기사에서 "지씨는 묵계월.안비취.김옥신씨를 잇는 경기민요 2세대로 주목받았다"고 적었다.

이제, 바로잡는다. 김옥신은 김옥심이 맞다. 그때만 해도 김옥심씨가 누구인 줄 몰랐다. 무지한 까닭이었다. 나중에 김문성 서울소리보존회 사무국장이 잘못을 일러주었다.

최근 김씨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 왔다. 김옥심 명창의 제자들이 무대에 서니 한번 둘러볼 것을 권했다. '전과(前過)'도 있고 해서 11일 은평문화예술회관을 찾았다. 700여 좌석이 꽉 들어찼다. 팔순의 이은주(무형문화재 57호) 명창도 자리를 함께했다.

'서울 소리의 멋을 찾아서'로 꾸며진 이날 무대에는 김옥심 명창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경기.서도민요 25곡이 울려 퍼졌다. 김씨의 수제자였던 남혜숙.유명순 명창의 주도로 30여 명의 소리꾼이 먼저 간 '선생님'을 기억했다. 국악인 사이에서조차 잊혀져 간 고인의 부활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고인의 노래 16곡을 디지털로 복원한 음반도 선보였다.

김옥심 명창을 들여다보면 우리 국악계의 어제와 오늘을 읽을 수 있다. 1925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88년 타계한 그는 '재야 인간문화재 1호'로 불렸다. 58년 서울중앙방송(KBS의 전신)이 주최한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내로라하는 명창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60년대에 이미 100장이 넘는 음반을 내며 국악계 특급스타로 활동했다. 가사.시조.잡가 등 장르 구분 없이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으며, 특히 한과 흥이 동시에 묻어나는 청아한 소리는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20대 초반 그에게 소리를 배웠던 '회심곡'의 김영임 명창은 "같은 노래라도 선생님의 소리는 슬플 때는 슬프게, 기쁠 때는 기쁘게 들린다"며 "50대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선생님의 진가를 알 것 같다"고 회고했다.

김옥심 명창은 80년대 이후 급격히 잊혀져 갔다. 75년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심사에서 떨어지며 국악계 중심에서 멀어져 갔고, 지병(신경성 고혈압)이 깊어지면서 제자들도 하나 둘씩 떠나갔다. 무형문화재에 오르지 못하면 번듯한 공연을 열거나, 기량 있는 제자를 양성하기 어려운 게 전통예술인의 현주소다. 심지어 국악계는 한동안 고인의 임종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11일 무대는 쓸쓸히 사라진 그 소리꾼을 되살려내는 자리였다. 스승의 마지막을 지키고, 이후에도 묵묵히 스승의 소리를 이어온 남혜숙.유명순 명창의 공이 컸다. 직장인이면서도 고인의 유성기 음반을 열심히 모으고, 월급을 모아 복원 음반을 만든 김문성씨의 노고도 각별했다. 20세기 한국 국악사의 빈틈이 일부 메워진 것이다.

문화관광부가 20일 예술가의 법적 권리와 지위를 보장하는 '예술진흥법' 추진을 발표했다. 그보다 먼저 예술인의 근황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다. 김옥심 명창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 간 예술가와 그들의 제자들에 대한 자료집 하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일례로 남혜숙.유명순 명창은 현재 생활보호대상자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거나, 그 문하생으로 있어야 기량을 인정받는 국악계의 풍토와 관련해 제도의 보완도 필요하다. 같은 경기민요라도 사람에 따라 창법.음색이 천차만별이고, 민요(문화)의 생명력은 결국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다 뜻 붙일까"(김옥심의 '한오백년') 가락이 오늘따라 더 애달프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