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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닦이 소년이 미군소령됐다/29년만에 금의환향 이갑수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용산서 구두닦이 미군만나 입양/한국계 최초 웨스트포인트 졸업
용산역앞 구두닦이 소년이 한국계로서는 최초의 웨스트포인트출신 미육군소령이 돼 고국을 찾았다.
『고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니 정말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아마 발전이 30년만 앞당겨졌어도 제인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최근 미ROTC후보생들의 병영입소훈련을 위해 46명을 인솔하고 내한한 미워싱턴주 교육사령부 ROTC교육작전장교 이갑수소령(42ㆍ미국이름 LEE Keith Miller).
한국내 전역의 주한미군부대에서 훈련중인 미ROTC후보생들의 훈련상태를 감독하고 있는 이소령은 29년전 불우소년으로 자신의 떠돌던 서울을 비롯,부산ㆍ대구ㆍ광주ㆍ대전 등 전국을 돌아보며 「그시절」생각에 젖어 고국에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인천출신으로 국교5년때 가난이 싫어 무작정 가출,용산역앞에서 미군을 상대로 「슈샤인보이」노릇을 하던 이씨의 운명이 바뀐것은 60년이 저물어가던 12월초 어느날 우연히 지금의 양아버지 로버트 밀러씨(79)를 만나면서부터.
『날씨가 몹시 추워 구두닦이 친구들과 함께 구두통에 쪼그리고 앉아 집생각을 하고 있는데 웬 잘생긴 「뺑코」가 지나가지 않겠어요. 당시 우리는 미군만 보면 떼를 써서라도 구두를 닦아주고 돈을 받곤했는데 그날 나는 웬일인지 미국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에 그 사람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것이 인연이 됐을 줄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당시 여의도에 있던 55항공중대장으로 이승만대통령의 전용기조종사였던 밀러소령(68년 중령예편)이 5개월뒤 본국 귀임을 앞두고 자식이 없어 쓸쓸해하는 부인에게 이 소년의 「순진한 눈빛」을 「선물」키로 했던 것. 첫 상면후 밀러소령은 이군을 영등포에 있던 성조지판매국판매소년(리틀타이거)으로 일하게 했고 이군의 품행을 눈여겨보다 61년5월초 입양키로 결정했다.
『양아버지가 찾아와 그분이 숙소로 쓰고 있던 반도호텔에 따라가 보니 어머니와 삼촌이 울면서 앉아계셨어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으려니까 어머니가 등을 두드려주시며 장래를 위해 양아버지를 따라가라고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갑수소년이 양어머니 로이스 밀러(68년 사망)여사품에 안긴것은 미국의 어머니날인 그해 5월13일 이소년은 입양직후 국교5년으로 편입,매튜중(콜로라도주소재)ㆍ클로버라크고교(워싱턴)를 거쳐 68년 「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웨스트포인트에 한국계로서는 최초의 입학생이 됐다.
영어실력부족과 밀도높은 훈련으로 입학동기 1천4백40명중 8백37명만 졸업한 가운데 1백37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베를린포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76년 대위에 이어 83년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77년1월부터 1년간 주한미2사단 포사에서중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미스탠퍼드대의 중국학석사로 3년간 모교의 중국어교관을 재내기도한 이소령은 79,80년 두차례에 걸쳐 꿈에 그리던 고국을 보기위해 팀스피리트훈련에 자원참가,양국간 연락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소령은 특히 80년 팀스피리트때 생모(당시 59세ㆍ그해 가을 사망)와 동생 갑철씨(39)를 만나 86년 동생가족을 미국으로 초청,이웃에서 함께 살고 있다.
현역으로 워싱턴주 매디건육군병원 화학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부인 데보러소령(38)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는 이소령은 『양아버지가 아니었으면 깡패두목이 됐을 것』이라고 환히 웃으며 『그러나 내 몸속에 한국인 피가 흐르는만큼 군복을 벗고난 뒤에는 고국에와 살고 싶다』고 희망을 밝혔다.<이만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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