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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위기상황 … 구한말의 경험 떠올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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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의 핵실험 사태와 관련, 본지는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48)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1996년과 2004년 두 차례 방북해 북한의 경제 현실을 직접 둘러보았으며, 20년 넘게 한국 경제를 연구해 오고 있는 한반도 전문가입니다. 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를 누구보다도 빨리 예견한 것은 끈질긴 연구의 결실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를 강조하며 한국과의 연대를 역설하는 지한파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신의 생각을 담은 논문이 '남북한 경제협력과 일본의 역할'입니다. 그는 얼마 전 "외환위기 직후 2년간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은 80점이었으나 그 뒤엔 50점으로 떨어졌으며, 현 정부의 정책은 30점"이라고 평가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한반도 전문가인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는 "한국은 이제 북한의 체제 붕괴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여론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일 오전 도쿄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두 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도중 그는 "한국은 위기 상황"이란 말을 여러 번 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북한의 핵실험을 누가 유발한 것인지를 놓고 말이 많은데.

"일면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1994년 핵 위기 때 만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성공했다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KEDO를 통해 뭔가 이뤄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걸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현실적으로 지금 미국이 북핵 문제에서 손을 뗀다면 해결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또 포용정책이 직접적 원인은 아닐지 모르나 한국의 대북 지원이 북한의 핵 개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한국의 포용정책이 실패했다는 말인가.

"포용정책은 수술이 아닌 한방을 통한 치료법이다. 따라서 시간이 필요한 정책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의 연착륙에 최소한 10년, 길면 20년가량이 필요한 것으로 봤다. 그런데 그 시간이 확 줄어버렸다. 가장 큰 원인은 최근 수년간 한국과 미국 간의 신뢰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 때는 개인적인 외교 노력도 있었고, 나름대로 한.미 간 동맹에 신뢰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엔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기대가 번번이 무너졌다. 또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진실은 무엇인가''한국은 도대체 무슨 컨센서스를 갖고 싶어하는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됐다. 이렇게 되다 보니 '한국은 미국.일본과 민주주의와 시장주의 가치관을 공유하기보다 북한과의 민족주의를 더 상위개념으로 놓고 있다'는 인식이 미국과 일본 지도부에 번지게 됐다. 한국 정부는 한국 국민에게조차 일관성 있는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최근 금강산 관광사업의 보조금 지급 중단 등 일부 대북 조치를 취했는데.

"미국과 일본의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의 동맹국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정책을 써도 반감이 별로 없다. 하지만 한국은 동맹이자 우방이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미국은 어느 정도 납득할지 모르겠지만 북한의 핵실험 이후 매우 강경해진 일본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 정부는 앞으로도 북한에 더 강경한 정책을 쓸 것으로 보나.

"그렇다. 일본의 국민성은 한국과는 다르다. 일본인은 문제가 표면화되기 전까지는 매우 잘 참지만 일단 표면화되면 멈추질 못한다. 그동안 일본 국민 사이에선 '우리가 돈만 퍼주는 기계였지, 우리 뜻대로 된 것이 무엇이냐'는 불만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번 북한의 핵실험으로 표면화됐다. 따라서 '뭔가 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조성돼 있다."

-일본의 대응이 다른 국가에 비해 과잉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솔직히 과잉이라는 점은 시인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아직은 초보다. 포퓰리즘적 측면에서 보면 강경하게 나가는 것이 박수를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최근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자민당 정조회장과 아소 다로(生太郞) 외상이 연이어 핵무장 논의의 필요성을 거론했는데, 무슨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핵무장 논의를 한다고 해도 일본 국민에게는 전혀 그런 컨센서스가 없다. 의견이 결집될 리도 없다. 핵은 보통 무기가 아니라는 점은 핵을 떨어뜨린 나라(미국)는 모른다. 일본인들의 '핵 알레르기'는 결코 간단치 않다. 두 사람의 발언은 일본의 핵무장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워싱턴의 일부 세력을 의식한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미국의 중국을 통한 북한 설득이 성공할 것으로 보나.

"중국이 보통 화가 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미국도 중국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문제로 발목이 잡혀 있는 미국으로선 중국이 이번에 북핵 문제를 잘 해결해 주면 주요 8개국(G8) 모임에 끼워준다거나 대만 문제와 관련한 양보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보나.

"나는 군사.안보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 한반도는 역사의 전환점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한 것 같다. 일단 완만한 위기가 2~3개월 계속되지 않겠는가. 미국의 중간선거 결과, 연말부터 대선 정국으로 돌입할 한국 정치 상황, 중국의 대북 강경자세 지속 여부가 중요한 3대 변수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그 사이에 북한이 2차 핵실험을 반드시 할 것으로 본다. 지난 주말 중국의 탕자쉬안(唐家璇) 국무위원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만났지만 미국은 결코 북한의 조건 달린 양보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일본과 약속했다. 중국이 에너지 지원 중단 카드를 꺼내들 경우 북한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한국은 지금 위기 상황이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한국의 입장이 뭔지 확실히 대내외에 알려야 한다. 내부 분란으로 위기에 빠졌던 100년 전 구한말의 경험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절대 전쟁은 안 된다'는 전제 아래 국민 대토론회라도 3~4일간 열어 한국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한국이 최대한 양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한국 사람들이 40년 넘게 고생해 이뤄놓은 것을 자칫하면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만일 외국인 투자자금의 이탈이라도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받을 타격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럴 경우 부동산 거품도 바로 꺼질 것이다. 결코 방심할 때가 아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 후카가와 유키코 교수=▶1958년 도쿄 출생 ▶82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졸업, 미 예일대 국제경제 석사, 와세다대 박사과정 수료 ▶87년 한국산업연구원 객원연구원 ▶일본무역진흥공사(JETRO) 연구원, 내각부 재정경제자문위원회 위원, 아오야마가쿠인대학.도쿄대 교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상.국제개발연구 오키타(大來)상.한국우수도서상 수상 ▶주요 저서 '한국, 선진국경제론' '정책위기의 국제비교' '중국의 WTO 가맹과 동아시아의 장래'.

"친중국 군부 쿠데타 가능성 충분히 있다"

후카가와 교수는 "경제학자적 관점에서 한국이 이 기회에 빨리 통일을 서두르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북한이 유엔의 제재를 견딜 수 있을 것으로 보나.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이다. 각종 경제 제재 조치와 더불어 미국 등이 선박 검색을 제대로 한다면 북한이 당할 충격은 대단할 것이다. 일단 북한의 자금줄인 마약 거래, 위폐 제조 등 불법 행위가 차단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이 마음먹고 에너지를 끊으면 곧 겨울을 맞게 될 북한은 큰 위기에 빠질 것이다."

-북한의 붕괴까지도 염두에 둬야 하나.

"수술적 요법으로 가는 시나리오, 핵은 수술 안 해도 체제가 붕괴돼 자연스럽게 무장해제되는 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역사적 전환점을 향해 바퀴가 굴러갈 것으로 본다."

-친중파 군부에 의한 쿠데타설도 나오고 있다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경제적 핍박이 군에까지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군의 성격상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중국도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친중파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중국 말을 들으면서 개혁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 한국으로선 적지 않은 스트레스다. 이 경우 한국과 미국과의 확고한 동맹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이 스스로 이걸 떨쳐내려고 하고 있으니 걱정스럽다."

-어떤 형태의 역사적 전환점이 예상되는가.

"아마 어떤 형태로든 통일이 되지 않겠느냐. 그게 한국에 가장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아직까진 민족의식이 강하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일 민족이라는 생각도 희석될 것이다. 따라서 그런 느낌이 남아 있을 때 통일하는 것이 당장은 큰 부담일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좋다고 본다."

-하지만 통일 한국의 경제적 부담이 클 텐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 경제의 체력을 감안할 때 통일은 가능하다면 빨리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 경제는 통일을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특히 인구동태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한국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으며 저축률도 떨어지고 있다. 한국은 사회보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저축을 깨지 않으면 노후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 소득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미안한 얘기지만 한국은 북한 주민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진다. 최근 5년간 잠재 경제성장률만 봐도 알 수 있다. 계속 떨어지고 있다. 물론 잠재성장률은 여러 정치적 요인에 의해 회복할 수는 있겠지만 인구동태적인 측면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체력이 좋은 시기에 통일을 하는 게 통일 후의 충격을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 통일을 한다면 한국이 감당할 수 있다고 보나.

"결국 시장이란 특정한 방향성이 보이면 그곳으로 자기실현적으로 가게 된다. 가장 안 좋은 것은 방향성도, 정보도 없이 항상 불안이 사로잡혀 있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불안이 폭발하면 시장은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을 때 어떤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 통일로 인한 충격이라고 해도 국제사회가 한국을 중심으로 북한을 돌봐주며 연착륙에 도움을 주는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를 미래로 떠넘긴다고 해도 북한 체제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북한이 서서히 개혁하고 개방하는 것에 대한 희망은 이제 없다. 한국인의 바람은 이해하지만 북한 체제로는 그게 안 된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느냐.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다시는 그런 실패는 안 할 것'이라는 강박관념 속에서 개방을 했지만 북한은 실패를 겪지 않고 피해의식만 있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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