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과 휴가철,문화의 생활화(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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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명훈씨가 이끄는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오키스트라의 서울 공연이 연일 수천 청중의 열광적인 기립박수속에서 연주되었다. 우리의 젊은 지휘자가 세계적 오키스트라의 지휘를 맡고 있다는 데 대한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이 그들의 탁월한 연주와 함께 어울려 상승작용을 이룬 축제의 한마당이기도 했다.
이미 알려진 대로 바리톤 최현수씨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입상을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여온데다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21일 또다른 행위예술을 시도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밖에도 적지않은 우리의 예술가들이 오래전부터 형성하고 있는 오늘이기는 하지만,최근에 잇따른 문화예술계의 신나는 행사들은 새삼 우리의 예술문화에 대한 성찰을 갖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성찰의 첫번째 출발은 우리의 잘못된 문화엘리트주의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중에서도 특히 예술분야는 물론 개인의 영감과 천재성을 전제로 한다. 천부적 자질과 피나는 노력,그것을 뒷바침하는 교육과 경제력이 뛰어난 예술가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는 예술가란 엘리트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엘리트주의란 그런 뜻에서가 아닌,모든 예술을 올림픽식의 1등주의로 평가하고 존중하려드는 우리의 잘못된 문화풍토를 뜻한다. 정명훈ㆍ백남준ㆍ최현수라는 뛰어난 예술가들이 1등이 되기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그들이 각고의 노력끝에 정상에 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격찬하고 성원하는 속물적 문화의식이 팽배해 있는 우리 스스로의 잘못을 비판하자는 뜻이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개인전ㆍ독창회ㆍ전시회에는 발길 한번 돌리지 않다가 국제전에 입상만하면,또는 화제의 인물이 되기만 하면 그림 한장값이 터무니없이 오르고 공연장ㆍ전시장이 미어터지는 그릇된 1등주의 또는 예술에 대한 허위의식을 차제에 벗겨내자는 제안이다.
예술에 대한 잘못된 엘리트주의가 예술에 대한 투기까지 불러일으키고 예술,곧 상류사회의 독점물이라는 등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예술문화에 대한 두번째의 성찰은,예술이란 결코 상류사회의 허영을 만족시켜주는 장식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깊고 향기롭게 꾸미는 생활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는 데 이르게 된다.
값비싼 음악회의 입장료나 엄두도 못낼 유명화가의 그림 한폭을 사는 것이 예술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다.
구겨진 신문지 한장을 펴서 연재되는 소설의 한 대목을 읽어보려는 충동,점심시간의 짬을 내어 좋아하는 화가의 전시장을 찾아가는 성의,무명 가수의 독창회에서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경이로움,오랜만에 찾은 영화관에서 가슴을 적시는 감동…. 이 모두가 각박한 도회의 지친 삶에서 위안과 평화를 찾는 보통사람들의 예술동참이 아니겠는가.
결국 예술문화를 삶의 일부로 편입시킬 때 우리의 삶이 폭력과 갈등을 벗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생활이 될 수 있고 그러한 문화공간 속에서 더욱 뛰어난 예술가들이 거듭해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제 초ㆍ중ㆍ고교가 모두 방학에 들어갔고 직장마다 휴가철을 맞게 된다. 벌써 방학과 휴가를 맞아 사치성 해외여행이 학생들간에,부모들간에 경쟁하듯 이뤄진다고 한다.
수백만원을 들여 자녀들에게 해외 스키연수를 보내고,수백만원을 들여 골프여행을 떠나는 풍조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고 보편화하고 있다. 고도 경주를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루브르 미술관을 찾고 동네 운동장에서 축구공 하번 찬적 없는 사람이 하와이 골프장을 누비고 있다.
해외여행이 무턱대고 비난의 대상일 수는 없다.그러나 직장의 재충전을 위한 것이 휴가이고 교과서 밖의 세계를 배우는 게 방학이라면 사치와 허영에 들뜬 값비싼 여행이 그 대상일 수는 없다.
자녀의 손을 잡고 국립박물관을 찾고,현대미술관에서 세계의 화가들과 만날 수 있다.
경주의 유적지에서,한강변의 선사유적지에서 조상의 삶과 만날 수도 있고 청소년 음악제에서 감동의 선율을 함께 나눌 수도 있다.
방학과 휴가를 맞아 무턱대고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예술과 문화를 삶의 영역속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가족을 문화의 울타리로 감싸고 여가의 창조적 즐거움을 새삼 발견하며 나아가 사회를 내면적 풍요로움으로 채우는 기회로 방학과 휴가를 이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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