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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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 현대연극사를 돌이켜보면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6·25전쟁은 잠시나마 연극사의 맥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았을때 6·25는 한국연극이 재정리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1950년 국립극장설립과 6·25 발발전까지만 해도 연극상황은 식민지행태의 연장이나 별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식민지 연극행태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는 것과 좌·우익연극인들의 첨예한 갈등뿐이었다고 하겠다.
그만큼 해방직후의 연극은 식민지행태의 연장선상위에서 생경한 이념극이 아니면 저질 신파·악극 등이 범람하여 혼탁한 상황만이 전개되고있었다. 그러나 정부수립과 국립극장 설립으로 민족극이 나름대로 토대를 마련하러 할 즈음에 6·25가 터짐으로써 그나마의 연극기반이 완전 붕괴된 것이다.
연극사상 최초로 몇개월동안은 명맥이 끊어진 상태였고 수개월 후에 겨우 연극무대도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결국 6·25로 말미암아 연극계가 대변혁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첫째가 저질 상업극의 정리라 볼 수 있다.
수십개가 난립하던 신파극단·악극단들이 급속히 퇴조의 길을 걷다가 소멸했고 국립극장에서 이탈한 본격극단 신협만이 숙원이라할 리얼리즘, 즉 정통신극으로 연극계를 주도해갈 수 있었다.
또 6·25로 인해 연극계의 세대교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인텔리겐차들이 연극을 주도했으며 미국문화와 함께 브로드웨이풍의 대중적 사실극이 주조를 이루면서 드라마센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연극의 큰 흐름의 변화를 6·25가 만듦과 동시에 전쟁체험의 신진 극작가를 한꺼번에 여럿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차범석·임희재·하유상·이근삼·박현숙·김자림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6·25동족상잔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측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소재가 되고 있으며 리얼리즘극을 심화시키기도했다. 그러한 예로써 차범석의 『산불』을 비롯해 이재현의 『포로들』, 노경식의『달집 』, 윤조병의 『고랑포의 신화』, 오태석의 『산수유』등 수작들을 꼽을 수 있고 최근에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6·25의 의미를 한단계 뛰어 올라서 우회적으로 접근한 희곡들이 등장하고 있다. 가령 이강백의 『칠산리』가 그런 부류의 대표작에 속한다. 유민영 <단국대 예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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