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제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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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수협 부정선거 수사를 중시하는 이유
처음으로 직선에 의해 선출된 수협중앙회장이 선거과정에서 돈을 뿌린 혐의로 구속된 사실은 우리나라 선거의 고질적 병폐에 대한 검찰의 척결의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검찰은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장 홍종문씨가 지난 4월 실시된 회장선거에서 단위조합장들에게 돈을 뿌리고 당선된 사실을 밝혀내고 구속수사를 시작한 것이다.
김상조 전경북지사의 구속에 이은 거물급 인사의 구속은 사정차원의 검찰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뜻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홍씨의 혐의사실이 이와는 별도로 선거과정에서 투표권자에게 거액의 금품을 은밀하게 건냄으로써 부정선거를 획책했으므로 직권을 남용한 치부와 부동산투기 따위의 개인적 범죄와는 질과 차원을 달리하는 비리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선거에 대한 부정이나 협잡은 민주주의체제의 근간이 되는 대의제도,혹은 그 기관의 권능과 권위를 뿌리째 흔드는 일로 가장 경계해야 할 공적이다.
역사상 최초로 어민들이 직접 뽑은 단위수협의 조합장들에 의해 선출된 이번 수협중앙회장의 선거는 새로운 직선의 관행과 전통을 깨끗하고 올바르게 수립하고,또 이어나가게 할 막중한 새 전통의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흠없고 모범적이기를 우리는 기대했다.
지자제를 앞두고 깨끗한 선례를 마련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뿌려 표를 매수하는 불법 타락을 저지른 것은 새로운 선거전통은 커녕 과거 정치판에서 있어 왔던 못된 관행의 확산을 가져온 결과를 빚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가 권위와 권능을 갖지 못하고,우리 정치인이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일반적으로 그들이 갖추고 있는 정치적 자질과 식견이 형편없는 데다가 그들이 선출되는 선거과정에서 보이는 타락과 부패ㆍ부정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광복이후 실시된 수십차례의 각종 선거에서 언제 잡음없이 제대로 된 선거 한번 치른 적이 있었던가.
관권이 개입하여 각종 부정과 협잡이 강요되거나 입후보자들끼리의 비방과 매표행위ㆍ금품살포 등 온갖 못된 짓이 선거를 둘러싸고 자행됐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런 부정으로 해서 당선무효가 돼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 마저 똑같은 작태가 연출되는 꼴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민간기구인 수협의 첫 선거에서는 새로운 공정선거의 싹이 돋아나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음이 밝혀진 데 대한 실망이 크며 이를 철저히 밝혀냄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다.
출마자가 선거에서 돈을 뿌리는 것은 당선되면 그 이상으로 돈을 긁어들일 자신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수협회장이 선거에서 뿌린 기천만원의 돈은 결국 영세한 어민의 호주머니에서 벌충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민을 위한 수협」이 아니라 「어민을 괴롭히는 수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가 사정의 칼날을 예리하게 세워갈 양이면 이번 수협의 경우도 우리나라 선거풍토의 근본적인 개선이란 차원에서 발본적인 수사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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