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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정책 포기하자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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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무현 대통령은 10일 오후 예정돼 있던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를 취소했다. 대신 청와대 집무실에서 보고서 등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생각도 정리하고 여러 가지 구상할 일이 있어서"라고 말했다.

오전에는 여야 지도자들과의 조찬 모임에 이어 전직 대통령들과 오찬을 했다. 그러나 이 일정도 "주로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윤 대변인)고 청와대 측은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북한의 핵실험 성공 발표는 취임 이후 추진해온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적어도 한반도 문제만큼은 한국의 의지대로 풀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자주외교를 주창해온 노 대통령에게서 북한 핵실험은 자율을 빼앗아가버렸다. 무엇보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초점을 맞춰온 정부의 외교 정책이 방향타를 잃었다.

누구보다 노 대통령 본인이 이를 실감나게 인정했다. 노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에서 '상황'이란 단어를 12차례나 언급했다. 포용정책과 관련해 "상황에 의해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국의 역할이, 자율성이 많이 축소되는 쪽으로 사태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며 "이것은 객관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이라는 상황 앞에서 노 대통령의 자주외교는 잔뜩 왜소해졌다.

단기 처방으로 노 대통령은 한.미 동맹을 강조하고 나섰다. "한국 각료들은 미국이 실패했다고 말하면 안 되냐"(7월 25일 국무회의)고 했던 노 대통령은 북한 핵실험 직후 9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미국이 동북아 지역 동맹국들에 대한 안보공약을 거듭 확인한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말했다. 10일 여야 지도자들과의 조찬모임에서도 "앞으로 한.미 동맹과 국제 공조를 튼튼히 해 안보 불안을 관리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자주에서 동맹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흐름이 감지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객관적인 상황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아직 중요한 결단을 미루고 있다.

대북 포용정책만 해도 9일에는 "포용정책에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10일 조찬모임에서는 "정책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데 인과관계 여부는 좀 더 따져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핵실험 결과로 포용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건 사실이지만 포용정책이 핵실험을 가져왔는지는 따져봐야겠다"고도 했다. 그 때문에 한나라당 등 야당에선 "대통령이 포용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게 아니냐"고 비판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 핵실험 이후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할지도 아직 분명한 메시지를 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모호함이 계속될 경우 국내외적으로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지금의 선택이 불러올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대북 포용정책의 포기는 국내적으로 지지 기반의 이탈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을 부추길 수도 있다. 국제적으로도 그동안 대북 정책의 지렛대 역할을 놓고 공동 보조를 맞춰온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 이럴 경우 동북아 정세를 둘러싼 역학 관계는 근본적으로 재조정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할지도 변수다. 당장 13일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딜레마다.

이처럼 북한의 핵실험은 노 대통령 앞에 간단치 않은 선택지를 들이밀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다. 상황 속에만 숨어 있기에는 사태의 전개가 급박하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은 초를 다투고 있고, 미국과 일본에선 다시 무력 제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 등을 둘러싼 관련 기업들의 혼란도 커지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이라는 초유의 상황은 노 대통령에게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박승희 기자

◆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북한을 화해.협력의 동반자로 규정해 대화와 대북지원 등을 통해 개혁.개방과 국제화의 길을 걷게 하겠다는 대북정책 기조.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주창한 햇볕정책이 여기에 속한다. 노무현 정부는 이를 계승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기초로 한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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