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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 담론 원점서 재고를" "북한 퇴로 열어 파국은 막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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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9일 북한 수해 구호품인 시멘트가 인천항에서 야적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북 지원물자 수송작업을 잠정 보류했다. 인천=연합뉴스

"한반도 정세와 우리 삶의 양식은 10월 9일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핵무장이 우려되는 등 동북아에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 같다."(전상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사회학)

"핵실험은 대북 화해 협력 정책에 대한 도전이다. 정부는 취임 초부터 밝혀온 '북한 핵을 용납하지 않는다'(비핵화 원칙)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북한에도 알려야 한다. 이를 통해 미국과의 신뢰를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

10월 9일 북한 핵 실험은 단순히 하나의 '실험'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 지식인 사회 전반, 특히 햇볕정책에 공감해 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민족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민족적 재앙'이 우려된다는 점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한반도 민족주의의 파산"=햇볕정책이 당장 도마에 올랐다. 대북 문제에서 '예방 외교'를 하지 못한 우리의 무력함을 절감하기도 했다.

뉴라이트(신보수) 성향의 전상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개성공단과 각종 인도적 사업을 포함해 모든 햇볕정책 사업을 일시 정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햇볕정책의 전면 폐기를 주장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지금 당장 햇볕정책의 잘잘못을 따지다가는 자칫 또다시 국론 분열의 상황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2002년 2차 북핵 위기 발생 이후 잇따른 미사일 발사 실험 등으로 햇볕정책의 파산은 이미 확인됐다"며 "지금은 한반도 민족주의의 파산을 선고해야 할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신 대표는 "87년 이후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도해 온 민족.통일 담론을 원점에서부터 근원적으로 재고해 봐야 한다"며 "이제 한국은 국제사회와 공조하는 노선과 김정일을 변호하는 노선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남한 시민사회의 지혜 필요"=진보 지식인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남북한 사이에 체결한 '비핵화 선언'이 쉽게 내팽개쳐진 현실 앞에 허탈해했다. 아울러 한반도의 운명이 대책 없는 초강경 대치 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했다.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북한이 수십 개의 핵무기를 개발한다 해도 중국.미국.러시아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게 동북아의 현실"이라며 "이번 사태는 분명히 북한 지도부의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안 교수는 "미국의 네오콘 등 극우 세력들이 북한을 한계상황으로만 내몬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며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선 남한 정부와 시민사회가 지혜를 발휘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그는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북한을 침략하거나, 아니면 더욱 봉쇄해서 고사시키거나 했을 경우 남한 정부가 그 짐을 떠안을 능력이 없다"며 "북한의 퇴로를 조금 열어 주면서 미국과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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