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김도수씨의 지독한 진뫼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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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고 있다. 그러나 농·어촌은 작년 다르고, 올해 또 다를 만큼 계속 찌그려져 가고 있다.

여기저기 쓰러져 가는 집들과 농사를 지을 힘이 없어 버려진 논·밭뙤기,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그마저 대부분 얼굴에 검버섯이 핀 노인들), 생기라곤 온 데 간 데 없는 고샅…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준 나머지 이젠 가죽만 남아 축 처진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고향. 고향의 모든 걸 흡양해 빈 껍데기만 남기고 도시로 빠져 나온 사람들. 그들은 오늘 발을 딛고 있는 도시에만 모든 정열과 돈을 쏟는다. 어제 자신을 길러낸 고향과 어머니는 한낱 추억일 뿐이고.

2001년 추석에 울력으로 복원한 마을 앞 섬진강의 징검다리에서 포즈를 취한 김도수씨와 부인 박은자씨.

그러나 자신의 탯자리와 (이젠 저 세상 분이 됐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유별난 사람이 있어 고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주인공은 전남 순천시에 살면서 광양제철소 협력사인 라경산업에 다니는 김도수(46)씨. 그는 거의 매주 주말·휴일이면 자동차를 1시간30분 이상 운전해 고향인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뫼마을에 가 보내며 마을 일도 이것저것 챙긴다.

진뫼는 앞으로 섬진강 상류가 흐르고 그 건너편과 집들 뒷편으로 산들이 달리는 산골. 30가구가 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20가구가 채 안 된다. 김씨가 최근에 하나 더한 공적.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150~200년 생 정자나무들이 있는데, 임실군이 영양 주사를 놓고,주변의 콘크리트를 걷어 내기로 했다.주민들이 와서 쉬라고 퍼붓어 만든 콘크리트 바닥과 평상이 뿌리의 생장을 가로막아 나무가 시름시름하기 때문이다.

임실군이 당초 계획에 없던 일을 하기로 한 데에는 김씨의 편지가 크게 작용했다. 편지의 요지는 ‘어린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돼 주고,어른들에게는 쉼터이자 의사당 역할을 했던 당산나무를 살려 주세요.’

임실군청 직원은 “편지를 읽어 보고는 도저히 나몰라라 할 수 없을 만큼 구구절절하게 쓴 데다 그의 고향 사랑이 하도 극진해 특별히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진뫼에서 5남2녀 중 여섯번째로 태어난 김씨는 26세 때인 1985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객지로 나갔다. 이듬해 고향 집은 외지인에게 팔렸고, 2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버렸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진뫼와 완전히 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고향을 잊을 수 없었고, 남의 것이 된 집을 자주 찾아가 향수를 달래곤 했다.

“새 집주인에게 되팔라고 사정도 여러번 했고,10년 이상 지난 98년 원래 팔았던 값의 13배인 650만원을 주고 되샀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중엔 폐가로 방치됐던 집을 2년여 동안 주말마다 어린 아들·딸까지 데리고 오가며 손을 봤다. 마을 노인들은 “도수야, 네가 오니 동네에 아이들 소리가 나는구나”하며 반겼다.
간단한 살림 도구와 세간을 들였고, 없어진 장독대도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주말이나 휴가 때면 부인 박은자(41)씨 및 딸(14·중2)·아들(12·중1)과 함께 진뫼에 와 지내기 시작했다.

“안방에 부모님 사진을 걸어 놓고서 제사도 이곳에서 지내니, 형제들 간도 한번이라도 더 모여지는 등 구심점이 생기더라구요. 또 내 자식들과 조카들에게는 고향이란 것이 생겨서 좋고요.”
김씨는 “부모님 제사 후에는 그 음식으로 동네 노인들을 대접하다 보면 그들로부터 아버지·어머니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어 좋다”고 덧붙였다.

노인들만 20여가구 살던 진뫼를 수시로 드나들며 ‘주말 명예 이장’ 노릇을 하던 그는 2000년 9월 마을에 울력을 붙였다. 추석을 쇠러 온 선·후배들을 모아, 마을 앞 섬진강에 징검다리를 놓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건넜지만, 콘크리트 보가 생기면서 다리 역할도 하면서 사라진 징검다리였다.
그리고 어머니들의 빨래 바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도 됐던 큰 바위 하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수소문 끝에 순창군 읍내의 한 관청에 ‘自律(자율)’이라고 새겨진 채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동네 어른과 출향 인사들의 도장을 받아 반환을 요구했고, 일주일 뒤 그 관청에서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바위를 가져다 원래 있던 강물 속에 놓았다.

2001년 마을이 크게 술렁거렸다. 한국수자원공사의 적성댐 건설 계획으로 마을이 수몰 위기에 빠진 것이다. 김씨는 그해 가을 호주머니를 털고 출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 앞 강변에서 작은 음악회를 여는 등 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이는 이웃 마을로 확산하고 여론을 환기시켜, 결국 댐 건설이 보류됐다.
모두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그리고 젊고 ‘빠릿빠릿한’ 그가 마을에 있었기에 (비록 상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는 2004년 7월 옛 집을 되찾은 과정과 마을 사람들의 사연, 고향에 대한 애틋한 추억 등을 묶어 책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냈다. 김씨는 “책이 나온 뒤 주인공으로 등장한,함께 자랐던 친구들과 마을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진뫼를 ‘언젠가 한 번 꼭 가 보고 싶은 마을’로 전국에 알리고 있다. 진뫼와 주민들의 이야기 등을 잡지와 자신의 불로그 등에 연재하고 있다. 김씨의 지독한 고향 사랑과 정겹고 따뜻한 진뫼 이야기는 머지않아 영화로도 만들어질 것 같다. 한 중견 작가가 프로듀서와 손잡고 시나리오작업 중이라고 한다.
“여름철에 수박이 먹고 싶어도, 돈도 돈이지만 무거워서도 사다 먹을 수 없는 게 요즘 농촌의 현실이예요. 고향이라도 삐죽 왔다가 가면,이런 안타깝고 심각한 속사정을 알 수 없죠.”

어머니가 일구던 텃밭에 세운 비석

김씨는 도회지로 나간 사람들에게 권했다.지금 사는 노인들마저 모두 세상을 떠나버리면서 고향을 완전히 잃지 않으려면, 한번이라도 더 들르고 골목골목 돌아도 보라고. 마지막으로 김씨가 고향 마을에 남긴 가슴 뭉클한 흔적 하나를 소개한다.
그는 어머니가 순창군 팔덕면 월곡마을에서 시집와서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뼈빠지도록’ 일만 했던 곳 가운데 하나인 마을 앞 텃밭의 가장자리에 올 늦봄에 비석 하나를 세웠다.

‘어머니·아버지 / 가난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월곡양반·월곡댁 / 손발톱 속에 낀 흙 / 마당에 뿌려져 / 일곱자식 밟고 살았네.’

비석 앞과 뒤에 새긴 문구다.

임실=이해석·장대석 기자,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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