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사과」 마찰… 현해탄에 격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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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 정부의 입장/“「과거원죄」분명히 반성해야/84년 수준으론 진정한 동반자못돼”
한일간 과거사에 대한 일왕의 명확한 사죄표명문제가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이 임박했음에도 여전히 양국간 외교적 마찰을 빚고있다.
일왕의 직접적이고 명확한 사죄표명을 요구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 일본측은 총리가 대신 사과하고 일왕은 의례적 유감표명에 그치겠다고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는 방일을 재고하라는 국민여론의 압력을 받고 있고 일본도 그들의 국내정치상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처지여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노태우대통령은 지난 14일 일본특파원단과의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일시에 일왕의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죄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했다.
같은날 일본집권 자민당의 당4역은 아키히토일왕의 사과는 지난 84년 히로히토일왕의 유감표명수준을 넘으면 위헌이라는 주장을 펴며 총리가 대신 사과하면 된다는 견해를 집약,이를 행정부에 전달했다.
이에대해 우리 정부는 일왕이 직접 지난 84년 수준보다 진전된 사죄표명을 하지 않는 한 우리 국민감정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정부의 확고한 입장으로 강도높게 전달했다.
지난 84년 전두환 전대통령 방일시 히로히토일왕이 했던 유감표명 (금세기의 한 시기에 양국사이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은 누가 사과를 하는지 주어가 없으며 유감이란 표현자체가 미온적이다. 또 사죄를 하고있는 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그말이 당시 국내언론에 사과표명으로 해석된 것은 권위주의 정권과 언론이 빚은 뼈아픈 실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노대통령의 방일자체가 21세기를 맞는 미래지향적 동반자관계를 설정한다는 데 중점이 있는만큼 과거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어야만 이같은 시비가 재연되지 않고 건전한 관계설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측 논리다.
사실 우리 국민이나 정부는 일본측이 굳이 일왕의 사과를 축소하려는 것을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일 자민당 4역회의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것은 총리이며 천황은 상징적 존재일 뿐이라고 한 것은 무슨 설명을 하더라도 우리 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욱이 지난 72년 중국과 국교정상화당시 공동선언에서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반성한다』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보면 일본이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음성적 자존심을 지키려하는 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 84년 전 전대통령의 방일때도 유감표명하나를 얻어내는 데 8개월간 외교력을 집중했었다』고 밝히고 이번에 매듭짓지 못하면 두고두고 다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 국민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우리의 과거사를 일본의 원죄로 보고있으며 일본이 여기에 대한 사죄·반성을 하지않는 한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물쩍 넘길 수 없는 한계를 안고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한국을 포함,인근 우방국이 가진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에 대한 응어리와 불신을 풀지 않고는 아무리 경제대국이 되더라도 일류국가로의 대접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우리측은 지적하고 있다.
다시말해 이번에 일왕이 직접 사죄하는 것이 일본자신의 국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논리다.
때문에 우리 정부는 노대통령의 방일 최후순간까지 일왕의 직접사과를 촉구하고 일본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면 방일자체를 취소하진 않더라도 일궁정 만찬때 대통령의 답례사를 통해 과거사문제를 다시 언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되면 한일간의 미래지향적 협력이란 이름하에 진행되는 정상외교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위험이었다.<조현욱기자>
◎일본 조야의 표정/「방일」계획 차질없도록 한국 여론 무마애써/위헌핑계 국왕엔 계속 보호막
일본 정부와 자민당은 과거문제에 대한 일왕의 사과문제를 둘러싸고 한일간의 공방이 예상밖으로 확대되어 나가자 의원이나 장관들의 개별적인 의견개진을 자제토록 함구령을 내리는가 하면 가이후(해부)총리가 국회에서 의식적으로 강도높게 과거문제를 사죄하는등 사태를 수습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특히 일본 정부는 아키히토(명인)일왕이 앞으로 할 사죄발언 표현이 『불행한 과거가 존재한 데 대해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로 결정되었으며 이는 84년 히로히토(유인)국왕이 했던 『참으로 유감』이라는 표현보다 훨씬 진전된 것이라고 일본언론을 통해 흘림으로써 한국의 여론을 무마시키려 하고 있다.
또 이 문제에 대해 『일본이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오자와(소택) 자민당간사장도 한국측이 이 발언을 「망언」으로 규정하고 나서자 뒤늦게 『매스컴의 이해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해명하고 있다.
15일 오전 일본각의에서 하시모토(교본) 대장장관은 『일왕 발언에 대해 각료가 개별적으로 발언하지 말고 총리·관방장관,외무장관 3자에게 검토를 위임하자』고 이례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자와간사장 발언에 대한 또다른 동조자가 나와 사태를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표면적인 수습방침과는 달리 일본 정부나 의회는 계속 일왕이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헌법상의 제약을 내세우며 새국왕의 입에서 「사죄의 말」이 나오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자와간사장의 발언도 한국의 사과요구를 미리 견제해 보고자하는 속셈에서 나온 「의도적 행위」라는 분석도 있다.
사실 대부분 자민당의원들은 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청구권을 통해 해결했으며 특히 나카소네(중증근)내각시대에도 40억달러를 경제협력이란 형태로 한국측에 제공해 「성의」를 다했다는 기분을 갖고 있다.
이같은 당내의 분위기는 15일 자민당부간사장회의에서도 재확인했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측의 대일요구가 너무 과대해지기 시작했다』 『내정간섭이 돼서는 안된다』는등 강도높은 의견이 속출했다.
그렇다고 노대통령의 방일을 코앞에 두고 더이상 이 문제로 한국을 자극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부적인 결론에 따라 여러채널을 동원해 한국을 설득하고 있다.
자민당 3역은 곧 이원경주일대사를 개별적으로 만나 이 문제가 더이상 불씨로 번지지 않도록 한국측의 이해를 촉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야자와(궁택)전 대장장관도 15일 이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노태우대통령이 일왕의 명백한 사죄를 기대한 데 대해 『일본의 신헌법하에서 천황폐하가 상징적 존재라는 것은 여당뿐 아니라 사회당등 야당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며 당론 결정이 불가피 했음을 설명했다.
오자와간사장의 발언을 놓고 일본언론이 『일본 사람들의 속마음(본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듯이 일본이 드러난 속셈을 한국과 어떻게 타협해갈 지 궁금하다.<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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