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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9)평성 경 건축양식 신라도성과 흡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우리나라의 경제가 근년에 급속히 성장하게 되면서 그 동안 접할 겨를이 없었던 경제외적 현실에 대해 하나씩 다루어 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일본 속의 한문화」에 대한 관심사도 그 중 하나가 된다.
최근 일간지나 잡지를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비한다면 문화관계 기사가 차지하는 지면이 크게 늘어났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는 민족과 특정분야의 뿌리를 찾는 역사적 유적이나 미술사적인 문화재에 대한 해설과 소개가 주류를 이룬다. 이 가운데는 일본 내에 흩어져 있는 한문화에 대한 소개도 상당히 많다.
필자는 지난해 7월 하순에서 8월 초순에 걸쳐 방학을 이용, 20여 일의 일정으로 일본의 북륙 지방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출발시기를 7월 하순으로 잡은 것은 일본도 우리나라와 같이 이 무렵에 장마철이 끝나기 때문이다. 일본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해양국이어서 그곳의 장마는 우리나라에 비해 그 정도가 극심하다. 그래서 그곳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이방인들은 습한 무더위에 견디기 어렵고 더욱이 여행은 고행이나 다를 바 없다. 같은 장마철을 겪는 민족이지만 그 정도의 차이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차이를 낳게 한 것일까.

<기후조건도 비슷>
일본문화의 기층에 한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사한 기후조건과 지리상의 근접, 체질적으로 유사한 모습, 그리고 인문적 여건에서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는 것 등 이라 여겨진다.
동경에 6일간 머무르는 동안 가야 사에 관한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동경국립박물관과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그리고 동경시내의 몇몇 대학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동경에 머물고 있을 때마침 동경박물관에서 8세기의 일본도성이었던 헤이조쿄 특별전이 열렸다. 고대 일본문화를 이해하는데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전사였다.
전시된 자료는 일본의 고대도시문화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고대문화와 비교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의 도성인 경주의 유적·유물과 비교되는 것들이어서 크게 관심을 끌었다. 또 신라문화 발굴작업에 필요한 좋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전시이기도 했다.
헤이조쿄는 나라시대의 도성으로서 현재 나라 시에 위치한다. 서기 710년, 같은 나라분지의 남단에 자리했던 후지와라 궁에서 천도하여 현재의 경도인 헤이안쿄로 옮겨가기까지 약 70년간 일본의 도성으로 사용되었다.
도성의 규모는 동서로 9·9km, 남북으로 4·8km이었다. 주작 대로를 중앙로로 하여 바둑판의 눈금처럼 통로를 만들어 가구를 배치하였다. 이 성은 천황과 3백여 명의 귀족을 정점으로 한 정치·문화·생산·소비의 중심지였으며 중국의 도성 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도시였다. 율령으로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화려하고 장중한 사원·관아·저택을 건설했고 승려·관리·공인·상인·농민 및 그들 가족 20만 명을 수용함으로써 중국 및 신라의 도성과 비교되는 국제적인 도시이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자비 왕 12년(469)에 경도(광주)에 중국식 행정구역 명칭인 방리명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소지 왕 12년(490)에는 처음으로 시장을 개설,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하게 했고 지증왕 10년(509)에는 동시를 개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은 신라도성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초에 걸쳐 이미 중국식 도성 제를 도입하여 건설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신라왕 경에 비한다면 일본은 694년에야 비로소 중국식 행정지역 명칭인 조 방제를 도입하였고, 헤이조쿄 건설에 중국도성 제를 처음으로 도입한다.

<신라 통해서 발달>
그런데 일본인들은 헤이조쿄가 중국도성을 모방해 건설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얼마만큼 비슷한 것인지는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만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의 문헌에 따르면 헤이조쿄 건설이 있기 직전인 701년,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견 당사의 파견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학자들은 헤이조쿄 설계가 직접 중국에서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701년의 견 당사가 있기 전까지 중국과는 교류가 없었던 대신「견 신라 사」의 왕래는 빈번했다. 그리고 빈번했던 신라와의 왕래를 통해 일본의 상류층 문화와 불교문화가 정돈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 고대문화는 신라를 통해 발달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교류의 분위기는 거대한 도시의 건설에도 적용된다. 헤이조쿄 건설 직전에 중국에 견 당사를 파견했다고는 하나 한 두 번의 왕래에서 어려운 도성설계를 익히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 빈번한 왕래가 있었던 신라로부터 건축기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 하겠다.
또 당시 한반도정세로 미루어 실제 도성공사를 진행함에 있어 중국에서 지식과 기술을 익힌 백제·고구려 망명인의 힘을 빌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헤이조쿄는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도성을 충실히 모방했다 기보다는 신라도성이 갖는 기본특징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묵필로 얼굴 그려>
특별 전에 출품된 유물가운데 눈에 띄었던 것은 삼국시대 도자토기 제작기술을 배워 만든 스에키와 더불어 통일신라 적 취향이 강하게 풍기는 불상·불구 등의 금속공예품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신라에서 제작된 녹주합(녹색 유약을 칠한 합)과 인화 문토기 골호(뼈를 담는 항아리)등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골호는 불교에서의 화장풍속을 뒷받침하는 용기로 이 골호가 유약을 칠한 고급품이 아닌 평범한 신라제품이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느껴졌다.
사실은 일본과 신라의 교역관계가 아주 밀접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며 왕래도 빈번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경주의 신라도성이 발굴되면 더욱 확실한 것을 입증해 주겠지만 이번 특별 전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전시된 유물들이 양식에 있어서 중국보다는 신라적인 요소를 더 많이 품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특별 전은 귀족계급의 유물보다도 서민층의 일상생활용구가 많이 전시된 것이 특색이었다. 그 가운데 흥미 있었던 유물은 묵필로 얼굴을 그린 토기였다. 얼굴표정이 모두 비슷한 점으로 보아 대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토기는 연못이나 샘·개천 등에서 출토된다고 하는데 그릇에 그려진 노옹의 얼굴은 역병 신이고 때로는 염마왕의 사자나 귀신을 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숨을 그릇에 불어 넣어 봉한 후 그것을 개천 등의 물에 띄워 보내면 역병으로부터 구제 받는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주술적이고도 소박한 마음을 읽게 하는 유물이다.
신라에서는 시대가 앞서고 인 면의 그림도 없으나 고분에 부장품으로 연질적색토기를 넣는다. 이것이 일본의 인면 토기처럼 주술적인 풍속이라면 양국이 불교와는 다른 토속신앙에도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하겠다.
윤용진<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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