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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은 좀 줄더라도 정년 늦춰 일자리 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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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전선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정년을 만 57세에서 59세로 연장했다. 50대의 나이에도 생산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왼쪽부터 김충모(54).이상재(58).김남호(50)씨가 전선을 쌓아둔 야적장에서 웃고 있다.김태성 기자

14일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대한전선 공장. 선선한 가을이지만 동판을 녹여 구리선을 만드는 용광로 주변은 삼복 더위보다 더 뜨거웠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이상재(58)씨의 얼굴은 용광로의 열기에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1974년 입사한 이씨는 이제 용광로의 불꽃 색깔만 보고 산소함량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숙련된 기술자다. 그는 원래 지난해 정년을 맞았다. 그러나 지난해 말 회사가 정년을 만 57세에서 만 59세로 연장하면서 2년 더 회사를 다닐 수 있게 됐다. 대신 임금은 최고 4700만원 정도를 받다가 근무 성적에 따라 10~30% 정도 깎이게 됐다.

이씨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뭘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 나이에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다는 데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대한전선은 2003년 11월 노조의 요청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50세 이후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당시 회사는 매출액이 줄어드는 등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때 노조가 임금을 양보하고 회사에 고용 보장을 요구하는 윈-윈 게임을 제안한 것이다.

회사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2005년 5월 연봉의 50%에 해당하는 회사 주식을 근로자들에게 나눠줬다. 주가가 현재 두 배 정도 올랐으므로 직원들은 1년치 연봉을 '보너스'로 받은 셈이다. 회사는 또 그해 12월 직원의 정년을 연장했다.

초고압 전력케이블 제작 공정에서 일하는 김충모(54)씨는 "정년까지 다니면 두 딸도 회사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하는 것에 비해 훨씬 안정감이 있다"고 말했다.

?임금피크제.정년 연장 확산="임금 삭감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늘고 있다. 노동부는 현재 국내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이 5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업은행의 경우 만 55세가 된 직원을 고(高)경력 직원으로 전환시킨다. 이때부터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면서 나이가 들수록 임금이 깎이는 대신 정년이 58세에서 59세로 늘어난다. 만 55세 이상 고경력 직원은 6개월 이내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연수 및 퇴직 관련 프로그램을 받아야 한다. 단순히 정년을 연장하는 게 아니라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열 수 있도록 전직.창업 등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국농촌공사는 고위직보다 중.하위직에 혜택을 주는 쪽으로 임금피크제를 설계했다. 농촌공사는 1급이 58세, 2급과 6급이 57세, 3~5급은 56세로 직급에 따라 정년이 달랐다. 그러나 올해부터 정년을 58세로 일원화했다. 중.하위직은 정년이 연장된 셈이다. 대신 과거 정년 나이를 기준으로 1년 전부터 임금을 예전의 70~80% 수준으로 깎았다. 공사 측은 경지 정리, 농업용수 개발 등 민원이 잦은 현장에서 경험이 많은 고령 직원의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할 수 있는 기간 확 늘려야=우리나라는 2000년에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7%를 넘는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다. 2018년엔 65세 이상 노인이 14%를 넘어서는 고령사회에 진입할 전망이다. 그러나 '사오정'(45세 정년),'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실제 정년이 오히려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말 근로자 100인 이상 기업 1000곳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1%가 체감정년이 50세 이하라고 대답했다. 2004년 노동연구원이 은행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체감 연령은 49세에 불과했다. 직장에서 은퇴한 뒤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 셈이다. 이 기간에 특별한 소득 활동이 없을 경우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일부 기업에서 임금피크제와 정년 연장을 도입하고 있지만 노령화 속도에 비춰볼 때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국내 임금피크제는 대부분 60세 이상의 고령인력보다 60세 이전 인력을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다. 정년이 연장된 기간도 평균 1년으로 일본 시니어 사원제도의 정년 연장기간(5년)보다 훨씬 짧다.

일본의 산요전기는 최장 65세까지 정년을 연장할 수 있다. 이 경우 55세를 정점으로 60세까지 피크임금의 70~75%가 지급된다. 65세 이후엔 월급 15만 엔과 상여금 20만 엔+α가 주어진다. 미쓰비시전기는 정년 후 재고용을 통해 최고 65세까지 일할 수 있는 '선택적 고용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영국.스웨덴.네덜란드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의 평균 퇴직연령은 60세를 넘고 있다. 그럼에도 유럽연합(EU)은 2002년 바르셀로나 협약에서 모든 회원국이 실제 퇴직연령을 2010년까지 5세 높이는 정책목표를 채택했다. 적어도 연금 수급 연령인 65세까지는 일할 수 있도록 보장, 사회의 주축인 중산층을 유지하겠다는 취지다.

이지만(경영학) 연세대 교수는 "저출산.고령화사회에 대비하려면 60세 이상의 고령인력을 활용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며 "기업들 입장에도 고령인력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면 앞으로 노동력 부족시대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 특별취재팀=고현곤(팀장), 양영유.정철근(사회부문), 나현철.김준술.손해용.임장혁(경제부문), 장정훈(디지털뉴스부문), 변선구.최승식(사진부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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