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민족 우월주의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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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통독으로 사라지는 것은 동독뿐만이 아니다.
독일 역사상 가장 우호적이고 평화 지향적인 사회였던 서독도 불명예스러운 퇴장의 미래를 맞고 있다. 콜 서독총리는 현재 독일통일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독일은 금세기초 안하무인격이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끝도 없이 정치·경제적 팽창만을 추구함으로써 온 세계가 혐오했던 과거의 독일제국을 닮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
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과거 독일민족의 오만함은 독일제국을 패배로이어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1918년의 패전과 잇따른 좌익혁명은 독일제국 당시 이미 독일사회에서 만연했던 국내 유대인·좌익분자들에 대한 혐오증을 증폭시켰다.
이것은 나치당의 탄생을 초래, 수천 국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수백만 국민의 수동적인 묵시적 참여에 힘입어 6백만 유대인학살이란 대 참극을 빚었다.
결국 인륜을 저버린 정부는 전체주의 전쟁을 일으킨 끝에 완전히 패망했다.
민족적 수치심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덕성과 합리성에 대한 생생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2차대전후에도 한때 서독 내에 나치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나치추종자들이 군·정부·경제계에서 요직을 차지했던 때도 있었지만 현재의 서독은 많이 달라졌다.
민족주의·군국주의·쇼비니즘이 사라지고「독일영광」에 대한 향수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국제주의로 대체됐다.

<민주인사들 소외>
독일국민들은 정치보다 안락한 생활을 택하고 사회 곳곳에서 지적 토론이 활발히 전개됐으며 심지어 반문화주의자, 과격한 여성 해방론자, 환경론자들까지 유례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베를린장벽 붕괴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스탈린 시대의 암흑기에 동독 내에서 인권과 민주화를 외쳤던 과학자·목사·예술가가 계속 아웃사이더 (국외음)로 남아있고「통독」이 아닌「민주사회」를 추구했던 평화적인 동독혁명의 성격이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서독의 각 정당들은 동독 내정치색이 같은 정당들을 지원, 동독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부유한 서독은행·기업들도『서독경제체제를 따라올 것』을 종용하고있다.
서독정부가 동독을 지원하는 의도는 민주화혁명에 대한 지원이나 민족적 동질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네가 내편이 아니면 턱을 날려버리겠다』는 격언과 같이 동독을 수하에 놓겠다는 것이 본래 의도다.
앞으로 동독정부가 주요정책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대해 서독은 불쾌감을 느낄 것이며 동독은 사실상 주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콜 서독총리는 세계가 두려워하는 독일민족주의를 조장, 세계가 어쩔 수 없이 통독을 지원하도록 강요하는 전략을 택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공포분위기 조성>
통독을 반대하는 소련조차도 서독의 경제·군사적 반격에 부닥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독정부는 세계가 독일에 대해 갖고있는「본원적인 공포감」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 지향적이고 이성적인 서독이 사라지고 부유하지만 음험한 괴물이 대신 들어서 세계에 새로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선 안 된다.
동서독의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민족적 우월감」을 혐오하고 있다.
설혹 통독이 되더라도 통일독일의 새 정부가 가상의 적보다는 평화의 수호자로 남도록 하기 위해선 유럽내의 다른 국가가 더욱 결속, 완전한 유럽통합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것만이 또 다른 히틀러의 등장을 막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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