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7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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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여운형­김일성 극비 면담설/이승만ㆍ김구의 「민주의원」결성에 불참
이승만ㆍ김구등 우익보수진영의 최고지도자들은 모스크바 삼국외상회의를 계기로 단결,공산당을 고립시키기 위해 맹렬한 공세로 나왔다.
이승만계의 독촉중앙협의회와 김구계의 비상정치회의가 중심이 돼 2월14일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구성했다.
나는 신문기자로서 이날 회의를 참관하게 됐다. 지금도 인상에 깊이 남아있는 것은 테이블위에 놓여있던 여운형의 명패다.
여운형은 그다음날인 2월15일에 개최될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최고지도자의 한사람이었다. 나는 중학생때부터 여운형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좋게 말하면 폭이 넓고 나쁘게 말하면 양다리도 사양치않는 인물로 알고 있었다.
나의 관심은 이날 이자리에 여운형이 과연 출석하는 가에 쏠려있었다. 나는 여운형의 의자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쳐다보며 개회시간을 기다렸다. 10분전,5분전이 되어도 여운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중장의 정치고문 버치중위가 초조한 기색으로 들락날락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개회3분전이 되어도 여운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개회시간이 임박하자 버치중사가 여운형자리 뒷문을 열고 들어와 여의 명패를 살짝 들고 나갔다. 여운형은 결국 참가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순간 『정말 여운형이라는 사람은 알수 없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나의 마음 한구석을 스쳐갔다.
여운형이 버치중위에게 어느정도 긍정적으로 말을 했기 때문에 명패와 자리까지 만들어놓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날 회의는 의장에 이승만,부의장에 김구ㆍ김규식을 선출했다. 이 세분이 각각 일어서서 연설을 했다. 이 세분중에 이승만이 제일 활기가 있으며 말도 잘했다. 김구는 두루마기 차림으로 붓으로 쓴 연설원고를 떠듬떠듬 읽었다. 김규식은 얼굴빛도 좋지못하고 기운이 없어서 의자에 폭파묻힐 것같이 앉아 피곤한 모습이었으며 정치활동을 할 건강이 못되어 보였다.
그날 참석한 분들중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분으로는 원세훈 김준연 백남운 오세창 조완구 조소앙 안재홍 장면등이었다. 김창숙은 명부에는 있었으나 출석하지 않았다.
김규식과 조완구는 체격이 작고 몸이 약해보였으나 김준연 백남운 조소앙등은 풍채가 좋았다.
김규식은 당대 정치가로서 제일가는 지성인이고 조완구는 그의 이름대로 팔이 아홉개나 될것같은 굉장한 정략가로서 백범의 참모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방일보 권오직방에 돌아가니 마침 김오성등 인민당 간부들이 와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농담삼아 『오늘 군정청 민주의원 결성식에서 까딱했으면 동무네들 당수를 만날뻔 했다』고 하며 민주의원 결성식에서 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한 인민당 간부가 『글쎄 몽양이란 분은 정말 알수없는 분이야. 임정에도 가까이 했다가,장개석 국민당에도 가까이 했다가,소련공산당에도 가까이 했다가,일본에도 가까이 했다가 상해에서 잡혀온것도 경마장에서 잡혔다지 않아. 일본 밀정이 우글우글한 경마장에 간것은 잡아 달라고 간것 아니야. 요새는 또 미군정에 가까이 했다가 김일성에 가까이하고 있어.
평양에 가니 김일성이 자기를 「선생님,선생님」하고 굉장한 대접을 하더라고 김일성도 괜찮아해. 정말로 큰일이야. 인민당을 어디로 끌고 갈것인지 알수가 없어』하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다음날인 15일이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식의 날이었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이승만ㆍ김구ㆍ한민당,기타 우익보수 세력들이 대동단결하여 결성하는 민주의원에 대비해 공산당이 좌익및 중간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통일전선이었다.
공산당에 있어서는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김일성이 여운형을 끌어들여 남한에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것을 막기위해서도 필요했다. 고경흠이 여운형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막대한 정치자금과 여에 대한 초청장을 갖고 왔었다. 그 자금의 일부로서 고경흠과 최성환이 독립신보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여운형과 백남운이 고문이 되었다는 정보가 있었다.
고경흠과 최성환은 일제때 공산주의운동을 했으나 전향하여 해방후 박헌영의 공산당에서 그들을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운형과 김일성에게 붙어 김일성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특히 고경흠은 최후까지 김일성과 여운형간의 연락원으로 활동했으며 47년7월19일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할때도 한차에 타고 있었다.
그때 여운형은 손가방안에 들어있던 문서는 김일성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미국모처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여운형은 김일성의 초청으로 극비에 평양에 가서 소련군 정치부 로마넨코소장및 김일성과 만나고 왔다는 정보가 평양에 배치돼있는 프락치와 인민당안에 있던 프락치로부터 공산당중앙위원회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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