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국민들에 희망을 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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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비전 2030 자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2030년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9000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지금의 스위스와 같은 복지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GDP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평균수명.교육.복지.문화.인권.환경 등 한 나라의 발전 수준과 삶의 질을 나타내는 어느 지표라도 국가 간에 비교해 보면 거의 1인당 GDP와 비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 발표 자료에 여러 가지 복지국가의 장밋빛 청사진을 그려 놓았지만, 그것은 1인당 국민소득이 복지와 비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GDP가 국민소득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기엔 매우 중요한 경제원리가 담겨 있다. 한 나라 국민의 전체 소득은 그 나라에서 생산된 총생산물의 가치를 초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살기 위해서는 생산량 또는 생산물의 가치를 늘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GDP가 증가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제도와 정책이 국민으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좋은 기술과 장비를 지속적으로 투입하도록 만들면 총생산물의 가치가 증가하고 국민소득이 증가한다. 한국의 지난 40년 경제발전이 바로 이 과정이고, 최근 경제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도 경제체제의 개혁을 통해 국민의 의식과 행동변화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 경제가 지속적으로 높은 경쟁력과 생산성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새로운 기술과 생산설비가 계속 생산과정에 도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지난 5년간 연평균 1%에 불과하다.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과 설비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는 경제에 미래가 있을 수 없다. 또 성장 잠재력은 한 나라 국민 중 얼마나 많은 국민이 경제활동에 참가하는가에도 달려 있다. 지금 한국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0%를 약간 넘고 있다. 선진국은 대부분 70% 수준이다. 한국에서 인구 10명 중 4명은 남의 돈이나 저축해 놓은 돈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남의 돈으로 살거나 벌어놓은 돈을 까먹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경제가 활력이 있을 리 없다.

또 성장 잠재력은 그 나라가 얼마나 개방적이고 경쟁적인가에도 달려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경제에는 개방과 경쟁을 반대하는 이익집단의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다. 노동.자본.토지의 조달과 배분을 담당하는 요소시장은 각종 규제에 묶여 시장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노동이나 토지를 시장원리에 따라 생산적 용도에 배분하자고 하면 반사회적인 주장으로 여겨질 정도다. 결국 그 결과는 계속 낮아지고 있는 한국경제의 경쟁력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경제가 지난 몇 년간 성장 잠재력이 하강하고,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결코 단기적 현상이거나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도와 정책이 국민을 열심히 생산적으로 일하게 하기보다 떼쓰기와 우기기, 도박과 투기에 빠져 무책임하고 게으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성장 잠재력이 사실상 영(零)에 가까운 상태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2030년까지 4만9000달러의 국민소득은커녕 지금의 국민소득과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워질지 모른다. 그런 정부가 갑자기 24년 뒤 우리나라가 스위스 같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니 국민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어떤 비전이든지 그것이 국민에게 감동을 주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것이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져야 한다. 현 정부가 진정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다면 무엇보다 지금 한국 경제의 잠재력과 경쟁력을 좀먹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제거하겠다는 의지와 비전을 먼저 보여주었어야 했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