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고여 삶이 되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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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호수는 시시각각 다른 색깔의 옷을 입는다. 아침에는 운동하는 사람들, 점심때는 회사원들, 저녁에는 연인들이 호수에 각기 색다른 풍경화를 그려낸다. 국내 대표적인 도심속 호수공원 송파구 석촌호수. 그 하루를 들여다본다.

# 새벽-상쾌한 하루를 열다
지난달 30일 오전 6시쯤. 환경미화원들의 힘찬 비질 소리가 잠든 호수를 깨울 무렵 운동복 차림의 주민들이 하나 둘씩, 때론 삼삼오오 모여든다. 수변무대 입구 쪽 10여 가지 운동시설에는 어느덧 운동복 차림의 노인들이 운동기구와 씨름하고 있다. 운동시설은 주로 중장년층들이 이용한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열심히 맨손체조를 하는 모습도 눈에 익숙해졌다. 잠실3동에 산다는 이충일(65)씨는 "이웃 노인들과 함께 매일 아침 가벼운 운동을 한다"며"하루라도 안나오면 몸이 찌뿌드드해 큰 비가 오지 않는 한 출근하다시피 한다"고 말했다. 석촌호수에는 모두 3곳에 42개의 운동기구가 설치돼 있다.

호수 산책로는 조깅족들로 활기를 띤다. 출근을 앞둔 직장인들이 애용하는 코스다. 회사원 김민아(26.여.송파1동)씨는 "아침마다 호수 산책로를 걷거나 달리는 맛에 푹 빠져 있다"며 "우레탄 조깅로를 달린 뒤 지압보도에서 발 마사지를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말했다. 석촌호수가 야외 스포츠센터로 톡톡히 한몫하고 있는 셈이다. 우레탄 조깅로는 총 길이 2.5km. 지압보도는 모두 6곳에 깔려 있다. 오전 7시쯤이면 석촌호수에는 활기찬 음악이 방송된다. 아침이 활짝 열리면서 주민들은 바람에 이는 호수를 보며 직장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긴다.

# 점심-나른함을 떨쳐내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운동복 대신 넥타이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인근의 샐러리맨들에게 석촌호수는 직장에서 가까운 최적의 산책공간이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에 '이보다 좋을 순 없다'다. 호수변 30분의 운동이나 산책은 식후 나른함을 달래는 데 안성맞춤이다.

인근 오피스텔에서 근무하는 김영일(41)씨는 "직장 동료와 빨리 점심식사를 마치고 호수를 한바퀴 걸으면 근무시간에 딱 맞춰 들어갈 수 있다"며"몸이 가뜬해져 오후 일과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했다. 피로도 사라지고 건강도 챙기는 것이다. 잔디밭과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는 낭만파, 그늘 아래 벤치에서 꿀맛 같은 토막잠을 즐기는 직장인들도 어렵잖게 목격할 수 있다. 소풍 나온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거나 재잘거림을 들을 수 있다.

한가한 평일 오후 2시쯤이면 호수 벤치는 온통 노인들 차지다. 끼리끼리 장기나 바둑으로 소일하거나 잡담을 나누곤 한다. 몇 시간씩 하늘과 호수만 바라보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흘러온 세월을 되새김하는 걸까.

# 밤-'낭만 고양이'가 되다
석양 무렵. 황포돛배와 뗏목의 실루엣이 예술사진 같다. 호수에 드리워진 가로등 불빛이 아메바인 양 흐느적거리는 오후 9시쯤. 가족단위로 야간운동을 하는 주민들이 쏟아져 나온다.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뛰거나 빨리걷기에 딱이다.

주부 이용숙(45.잠실3동)씨는"어떨 때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붐빈다"면서 "비가 와도 우산을 받쳐들고 운동하는 주민들이 부지기수"라고 전했다.

어둠이 내리면 호수 산책로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흐른다. 벤치는 온통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몫이다. 산책로 2곳에 조성된 포토아일랜드(사진촬영장)에서 사진을 찍는 커플도 많다. 오후 10시30분쯤 호수와 붙어 있는 롯데월드 놀이동산에서 '올드 랭 사인'이 나직이 울린다. 놀이동산이 문을 닫는 것이다.

그럴 즈음 석촌호수 이용객은 오히려 늘어난다. 데이트족은 물론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샐러리맨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걸쭉한 술판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공원 관계자는"호수를 사랑하는 주민들의 눈총이 무서워서라도 고성방가를 곁들인 술판이 벌어지는 것은 보기 어렵다"고 전했다.

자정을 훌쩍 넘겨 오전 1시쯤에야 호수는 서서히 쉴 준비를 한다. 물결도 잔잔해지고 풀벌레도 지친 듯 울음소리가 약해진다. 거친 호흡으로 산책로를 뛰던 주민들도 대부분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호수도 분주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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