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로 한국인에 사랑 “듬뿍”(마음의 문을 열자: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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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프랑스 신부 강진수씨/25년간 백49차례… 국내 최다/「증서」도 대부분 응급환자에 나눠줘
이마가 넓은 갈색 고수머리,돋보기를 겸한 도수놓은 금테안경이 얽혀진 매부리형의 큰 코.
강진수신부(54ㆍ대전성모병원 원목실장). 도무지 모습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해 보입니까. 저도 한국사람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제 형제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누에가 실을 풀듯 거침없이 풀어가는 구수한 말투. 그 누가 들어도 외국인 티를 느낄수 없다.
본명 존 크랭캉. 음률을 따져 프랑스인 친구인 여동찬신부가 지어주었다는 강진수로 더 잘 알려졌다는 그는 프랑스인.
25년간 한국에 살면서 꺼져가는 생명들에게 1백49차례나 자신의 피를 나누어준 국내 최다 헌혈기록을 갖고 있다.
강신부는 지난해 10월 대한적십자사로부터 「헌혈유공금장」을 받았다.
『하느님의 사랑은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그 나눔의 정신을 헌혈에서 찾았습니다.』
강신부의 첫 「사랑의 헌혈」은 65년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파리신학대학을 갓 졸업하고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선교활동을 펴기위해 한국에 와 서울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따분한 수업을 마치고 용산역으로 서울구경을 나갔어요.』
광장을 돌아다니다 모퉁이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피가 필요합니다. 이웃을 위해 헌혈합시다.』
녹음기를 틀어놓은듯 되풀이해대는 하얀 가운을 입은 아가씨의 호소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가씨….』
당시 한국어 실력으론 얼핏 이을 뒷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팔뚝부터 걷어올리고 무조건 헌혈버스에 올라갔어요. 그리고 불쑥 내밀었지요.』
당황한 간호원과 헌혈 권유 직원들이 한참동안 망설이다 강신부를 침대에 누이고 주사바늘을 꽂았다.
『헌혈하는동안 한국과의 인연을 생각했어요.』
강신부의 외가쪽 5대 조부뻘인 뮤스토신부도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박해가 기승을 부릴때 이땅에서 10개월간 복음을 전하다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했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한국사람의 풍습ㆍ생활상을 적어 편지를 보냈어요. 후일 친구분이 편지들을 모아 서간집을 출간했습니다.』
강신부는 어릴때부터 이 서간집을 통해 한국을 상상했고 신학대학을 졸업,신부서품을 받고 서슴없이 할아버지의 순교지를 선교활동지역으로 택했다.
강신부는 1남3녀중 막내로 스위스 접경지역인 생크로드지방 출생.
외삼촌이 신부,이모가 수녀로 외가쪽의 영향을 받아 폴라링 소신학교ㆍ대신학교를 거쳐 파리신학대학을 졸업했다.
첫 헌혈이후 재헌혈 금지기간인 2개월마다 거르지않고 헌혈해온 강신부는 자신이 받은 헌혈증서 1백49장중 1백36장을 이미 응급수혈환자에게 나눠줘 남은 것은 13장.
『남은 13장도 모두 어려운 생명을 켜는데 사용됐으면 합니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헌혈을 권유하는 강신부는 『왜 헌혈해야 하느냐』는 반문에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80년대초 전북대에서 불어강의를 맡고 있을 때였다.
여느날 같이 헌혈을 강조하는 그에게 한 학생이 물었다.
『마약중독처럼 교수님도 헌혈중독증에 걸리신게 아닙니까.』
잠시 당황했지만 강신부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남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는 중독은 「사랑」입니다.』<대전=최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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