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風景] 약사 추순자씨 손뜨개大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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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늘로 짜는 웨딩드레스.

손뜨개 연구가 추순자(秋順子.58.대구시 중구 대봉2동)씨는 요즘 자정을 넘겨 오전 한두 시쯤 잠자리에 든다. 곧 선보일 바닥 둘레 7m에 6m짜리 면사포 웨딩드레스를 짜는 일 때문이다.

드레스는 하루 10시간을 꼬박 짜야 5㎝가 올라가는 정도. 그는 이렇게 만들기 어려운 손뜨개 웨딩드레스를 벌써 네개째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번으로 웨딩드레스는 마지막이다. 1남3녀를 둔 추씨로선 웨딩드레스를 입힐 자녀가 더 없어서다. 마지막인 만큼 감회도 남다르다.

이번 드레스는 세 딸이 시집가던 날 입은 것과 달리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날(오는 19일.대구 문화웨딩) 새 며느리가 입을 예복이다. "이 웨딩드레스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주는 세상에 단 한벌뿐인 선물입니더." 그래서 1년 만에 다시 갖는 '패션쇼 겸 결혼식'에 진작부터 신경이 곤두섰다.

지난 2일 "손뜨개가 곧 삶"이라는 그의 연구소를 찾았다. 손뜨개 연구소는 1층 약국 한쪽에 두어평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의 다른 직업은 약사다. 젊었을 땐 약국이 잘 돼 대구 도심에 3층짜리 빌딩을 지었다. 그러나 요즘 약사는 부업으로 밀린 거나 마찬가지다. 의약분업을 분기점으로 일의 무게 중심을 손뜨개 연구소에 실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방전을 받기 좋은 병원 근처로 약국을 옮기지 않았다. "병원 처방전을 받다간 너무 바빠서 뜨개바늘을 손에 쥐기 힘들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뜨개용 털실과 추씨가 짜 놓은 스웨터며 조끼.치마.한복 등 옷 종류, 모자.가방.인형 등 각종 소품으로 가득했다. 반쯤 남은 공간엔 40대 아주머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등 대여섯명이 바닥에 받침대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추씨가 손에 대바늘을 쥐어 준 제자이자 회원이다. 견본을 보고 뜨개질을 하다 막히는 부분이 나타나면 추씨에게 한 수 지도받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 회원 저 회원 번갈아가며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는 이유다.

한시간 거리의 반야월에서 왔다는 70대의 한 제자는 "이곳을 들락거린 지 20년이 됐다"며 "별 것 아닌 것을 물어도 짜증 한번 내는 일 없이 가르쳐 주신다"며 추씨를 치켜세웠다.

그 말에 추씨는 손뜨개 예찬론으로 화답했다.

"나이 들면 노인들 치매 많이 오잖아예. 뜨개질하면 치매는 걱정할 필요가 없십니더. 손을 쓰면 두뇌활동도 활발해지고예. 거기다 입다가 싫증나면 풀어서 다시 짜 입을 수 있으니 얼마나 경제적입니꺼. 우리 식구는 여태껏 옷 한 벌 사입은 적 없십니더. 오죽 했으면 아이들이 '우리도 옷 한번 사입자'고 보챘겠십니꺼."

또 다른 회원 지소옥(71)씨가 거들고 나섰다.

"조끼며 스웨터를 짜서 아들.딸은 물론 사돈과 며느리에게도 선물했지예. 모두들 억수로 좋아합디데이. 며느리는 그때부터 용돈도 많이 준다 아입니꺼. 죽을 때까지 할낍니더."

집에서 뜨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한 아주머니 회원이 "여기서 배우면 쉬운데 돌아가면 금방 잊어 버린다"며 마무리가 제일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젊은 새댁은 추씨에게 "선생님! 늙지 마이소. 재주 아깝십니더"라고 말했다.

연구소를 직접 찾거나 인터넷 홈페이지(www.chusoonja.com)에 올려진 추씨의 견본을 보고 손뜨개를 하는 회원은 대구는 물론 서울.마산.진해 등 전국에 퍼져 있다. 이곳을 거쳐간 회원만 3천여명. 웬만큼 손뜨개를 하는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회원 대부분은 나이 50이 넘은 여성들. 최고령은 82세. 때문에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몰라 우편 견본을 고집하는 회원들이 많다.

추씨가 손뜨개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한테서 배운 손뜨개를 틈만 나면 잡았다. 여고시절에 벌써 동생 스웨터를 짜주었을 정도. 공부도 잘 했다. 경북여고를 나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약대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69년 7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가 약국을 개업하고도 그의 손뜨개 사랑은 계속됐다. 약을 짓는 틈틈이 손을 쉬지 않았고, 이렇게 뜬 털옷은 주변에 나눠 주었다. 백화점 같은 데서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값을 따지지 않고 사들였다.

그의 손뜨개 취미가 연구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것은 84년 9월의 첫번째 개인발표회 때. 손뜨개 인구가 갈수록 줄고 고등학교를 나와도 대바늘 코조차 걸지 못하는 세태가 안타까워 사재를 털어 전시회를 연 것이다.

"대바늘 하면 스웨터만 떠올리지만 남자 재킷과 코트, 심지어 한복까지 못 만드는 옷이 없어예. 좋은 작품을 혼자만 간직하면 뭐합니꺼. 그래서 만드는 방법을 다 공개하고 있십니더. 뜨개는 더없이 좋은 여가활용이고예…."

개인발표회를 계기로 약국 건물 3층에 아예 '추순자 손뜨개연구소'를 차렸다. 그의 열정은 이후 세차례의 전시회와 본격 패션쇼, 영진전문대학 강의로 이어졌다. 92년엔 그동안 만든 작품 1백90여점의 화보와 자세한 옷본을 곁들여 손뜨개 전문서적도 펴냈다.

추씨가 자랑하는 손뜨개 기법은 늘어지기 쉬운 어깨 부분을 2중뜨기로 마무리하는 것. 그는 두번째 저서를 준비하던 중 인터넷 대중화에 착안, 2000년 4월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 인터넷에 올린 작품만 옷.침대시트커버.인형.가방.모자 등 4백여종. 85년 이후 발표한 작품들이다.

손뜨개를 '전도'하면서도 그는 약국 경영은 물론 지금도 파출부 도움 없이 시어머니와 거동이 불편한 시조모까지 모신다. 공직에서 물러난 남편은 이제 약국일을 돕는다. 가족 모두가 그의 손뜨개 열정을 이해해줘 고마울 따름이라고. 하지만 추씨도 아쉬움에 휩싸일 때가 많다.

"손뜨개 인기는 갈수록 시들해지고, 값싼 중국산은 자꾸 밀려들고…. 중앙일보에 기사가 나면 젊은 여성들도 한번쯤 손뜨개를 다시 생각 안 하겠십니꺼."

그는 중.고교의 가정 과목에서 언제부턴가 편물이 빠져버린 걸 몇번이고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손뜨개작품 공모전도 열어볼 생각입니더. 이거예, 살려야 합니데이."

대구=송의호 기자

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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