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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의 딜레마(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이 출범 4년만에 진퇴양난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정열적인 개혁ㆍ개방정책에도 불구하고 소련인들은 그들의 생활이 전혀 개선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각 공화국에선 이 정책의 논리적 귀결로서 독자노선을 요구하는 소수민족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곳곳에서 유혈 인종분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미사일과 헬기 공격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공화국간의 내란사태는 민족간 감정대립에서부터 영토와 종교분쟁까지 복잡하게 얽혀 소련이 안고 있는 다민족 문제의 고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모스크바 정부는 이 유혈사태를 진압코자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래 가장 강력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육ㆍ해군 및 KGB(비밀경찰) 병력까지 현지에 급파했지만 사태는 계속 유동적이다.
사실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은 동구를 휩쓴 개혁열풍에서 보듯이 그동안 세계 지도를 바꾸어 놓을 만큼 냉전의 장벽을 허물었지만 이 열풍이 소련 국내로 역수입되면서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의 앞날을 위협하는 상황을 전개시키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을 거두자면 자유화ㆍ민주화 작업은 계속 추진돼야 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될수록 소련국민의 정치ㆍ경제 개혁욕구는 높아지고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도 거세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주 고르바초프가 독립을 요구하는 발트3국의 하나인 리투아니아에 가서 설득에 실패한 것도 이같은 속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만약 모스크바 정부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한다면 그곳에 사는 러시아민족의 처리와 경제적 손실을 차치하고라도 현실적으로 소련은 막강한 발트해군기지를 상실하고 다른 소수민족공화국의 독립투쟁에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는 현지 주민들에게 자율권 확대와 정치적 다원화등 유화책을 제시하는 일방 「독립을 하자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경고도 했지만 일단 자주노선의 열풍을 막는데는 역부족인 것 같다.
사실 소련의 15개 공화국중 러시아공화국을 제외한 나머지 공화국들,예컨대 백러시아ㆍ우크라이나ㆍ우즈베크ㆍ카자흐공화국 등은 거의 민족갈등을 겪고 있는 불안한 상황이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이같은 내란사태가 수습이 안되고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경우 모스크바 정부는 러시아제국 판도의 와해를 우려해 군대를 동원하는 강경 무력진압의 유혹을 받게 될 것이며,이런 상황은 고르바초프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고 크렘린내에 다시 강경보수세력의 등장 가능성까지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가공할 만한 핵무기를 가진 소련같은 대제국이 스스로 와해의 위협을 느껴 강경책으로 급선회한다면 힘겹게 마련된 탈냉전의 동서화해무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소련 개혁파의 기수인 옐친이 「3개월내에 주요 변화가 없으면 소련이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발하고 체니 미 국방장관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실패에 대비해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공언하는 것 등은 바로 그런 최악의 상황으로의 역전을 배제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모스크바정부나 각 소수민족 공화국들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을 위해 끈질긴 인내와 타협정신속에 사태를 수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위기를 대화로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만이 민주화를 열망하는 소련인들의 욕구는 물론 이제 겨우 싹트고 있는 평화공존의 국제환경을 가꾸어 나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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