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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조산업 유창렬회장 “전과자들과 일하는보람”(마음의문을열자:1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입사때 신원조회도 안해/좌절 딛고 선 집념으로 매출액 “쑥쑥”
방금 배달된 연하장이 책상위에 수북히 쌓인다.
사인마저 인쇄된 인사치레의 더미를 뒤적이던 해조산업(서울 도곡동 425) 유창렬회장(45)은 싸구려 모조지로 만든 봉투 한개를 집어든다.
발신지 영등포구치소­.
『푸른 수의,왼쪽 가슴엔 수인번호. 이제 40일 남짓이면 벽이없는 햇볕을 보게되겠지요. 하지만 씻어도 벗겨도 지워지지 않을 것같은 왼쪽가슴의 낙인은 밖을 쳐다보기조차 두렵게 합니다. 해조산업에 한가닥 희망을 걸어봅니다.』
87년12월 설립된 해조산업은 두부에 김ㆍ파래 등을 넣은 해초두부를 생산하는 종업원 3백명규모의 중소기업.
여느 기업과 다른 점이라면 5개 대리점과 경기도 화성군 제조공장에 이르기까지 종업원의 4분의1이 넘는 70여명이 전과자라는 「별」을 달고 있다는 점뿐.
『인사관리를 제가 직접맡고 있습니다. 인사과에서는 불필요하게 직원들의 신원조회를 못하도록 합니다. 한때의 실수나 오판이 잉태한 전과자라는 색안경이 그들을 다시금 범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거든요.』
공익광고를 통해 「1회사 1전과자채용」 캠페인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유회장은 지금까지 1천여명의 지지서명을 받았다며 도약의 90년대를 기대한다.
90%사원지주제인 이 회사의 매출대금중 1%는 전과자 재활 적립금.
유회장은 자신의 활동을 「신이 정해준 숙명」이라고 표현한다.
해방되던 해 대구근교의 빈농에서 태어난 유회장은 「배 하나 줄이자」는 부모의 찌든 가난으로 부산의 고아원에 버려졌다.
갖은 고생끝에 마친 고교 1년.
해군 장기하사관으로 지원입대한 유회장은 78년 예비역상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현재 시가로 따져 1천8백만원의 퇴직금. 그러나 불과 6개월만에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자동수면학습기 등 아이디어상품 판매업은 유회장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바닷바람이 몹시 찬 진해의 탑산.
소주와 극약 한봉지를 손에 쥔 유회장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마저 끊지 못하는 비겁함을 뼛속깊이 확인하며 산을 내려왔다.
서울에 와 브리태니커사의 세일즈맨으로 새 출발한 유회장은 버스안에서 모자란 잠을 채우며 하루 30여명의 고객을 만나는 각고의 판매기법을 터득,1년뒤 「한국이오니카」라는 이온수회사의 영업이사로 발탁됐다.
『그곳에서 전과자에 대해 첫눈을 뜨게됐어요. 비교적 죄가 가벼운전과자 10명을 채용했어요. 정식직원이 아닌 계약제세일즈맨이니 문제가 있으면 손쉽게 해고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의 누구보다 강한 삶의 적극성과 성실함이 유회장을 전과자재활의 전면에 나서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
86년1월 챔프그룹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 유회장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87년9월 대대적인 전과자영업직 모집광고를 내고 4백50명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일의 기회를 제공했다.
유회장이 채용했던 전과자들은 88년4월 챔프사가 사업확장에 따른 자금난으로 부도를 내고 파산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무보수로 판매에 나서는 등 「보은의 의리」를 보여주어 해조산업을 주축으로 유회장의 재기를 가능케 해준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유회장은 일단 받아들인 전과자를 서울 도화동에 있는 「성공동기연구소」라는 연수기관에 보내 3개월간 판매기법과 명상시간 등을 통한 교양교육을 통해 참신한 일꾼으로 탈바꿈시킨다.
자신과 같이 큰 좌절을 경험했던 전과자들의 일에 대한 집념과 회사에 대한 헌신적 노력으로 해조산업의 매출액이 작년에는 88년에 비해 2배이상이나 커진 1억5천여만원을 기록했다고 밝히는 유회장은 『백마디의 민생치안 강조보다 1회사에서 1명의 전과자를 채용해주는 것이 밝은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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