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스타일의 연두회견/친근감 좋지만 비전 제시 미흡(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노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을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전 통제되지 않은 기자들의 질문,미리 짜여지지 않은 회견의 진행등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익숙했던 천편일률적인 대통령회견과는 판이했다. 무엇보다 회견내용에 대한 야당들의 논평이 긍정적이었다는 것은 우리 기억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회견 형식의 진일보와 함께 노대통령이 밝힌 새해 국정 추진방향도 대부분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어서 별로 흠잡힐 대목이 없었던 것 같다. 질문이 집중된 정계개편문제에 있어 노대통령이 우회적으로 개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극히 신중한 입장을 취한 것은 이해할 만하고 정치에 있어 타협을 강조한 것도 충분히 수긍이 된다.
남북한문제에 있어서도 김일성의 「자유왕래」 제의를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현실성이 지극히 의심스러운 이 제의의 추진에 앞서 60세이상 이산가족의 고향방문등 당장 손쉬운 교류를 제의한 것은 우리측의 일관된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밖에 경제문제나 교육ㆍ교통분야 등에 관해서도 대통령은 문제의 소재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고 개선책의 추진에 있어서도 성실성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노대통령의 회견에 대해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 미흡한 느낌 또한 없지않다. 6공정부가 그동안 5공의 사슬에 발목이 묶여 독자적인 정책추진을 못하고 「6공다운 것」을 보여주지 못했음은 스스로도 한탄해온 일이고 국민들도 공감해온 터였다.
그러나 그 5공 사슬도 지난 연말로 풀렸고,야당들도 이제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는 새로운 정치환경을 맞은 만큼 뭔가 6공다운 비전을 제시할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욱이 시기적으로 천년단위가 바뀌는 새 시대를 예비하는 새 연대의 벽두라는 특별한 의미도 있으므로 국민에게 희망과 사기를 불어넣고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할 방향을 제시하는 절실한 메시지가 있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는데 이런 기대는 충촉되지 못한 듯 하다.
그리고 교육ㆍ교통ㆍ치안 등 구체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대통령의 답변은 모범답안처럼 사리에 맞고 온당하긴 했어도 당장 그런 문제로 고통받는 수많은 국민들의 시급한 갈증을 덜어주고 기대감을 주는 데는 다소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는 대통령의 연두회견에서 무슨 폭탄선언이나 중대발표가 나오길 바라지도,원하지도 않는다. 과거 흔히 국민적 합의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깜짝 놀랄 대북제의를 연두회견에서 터뜨리곤 하던 권위주의 정권의 행태가 되풀이돼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화급하고 절실한 문제에 대해서는 상식적 수준이상의 강한 의지와 절실한 대응자세를 보여줘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기자 질문가운데 있은 『대통령이 무섭지 않아 공직자 기강이 해이하다』 『정책이 자주 때를 놓친다』는 지적은 이런 점과 관련하여 6공정부가 뼈아프게 유념해야 하리라고 본다.
이제 정부는 노대통령이 회견에서 밝힌 국정방향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 지금껏 6공정부는 『중심을 잡지 못한다』 『구심력이 약하다』는 소리를 흔히 들었는데 임기 중반에 들어선 새해부터는 보다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새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끝으로 우리는 대통령이 좀더 자주 기자회견을 갖길 바라고자 한다. 이번에도 보면 질문은 많이 남았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이런 기회를 좀 더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