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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사건·사고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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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5공을 마감하고 6공을 등장시킨 동력은「6월 항쟁」이었고 그 불씨는 서울대생 박종철군(당시21·언어3) 이었다.
87년l월15일자 중앙일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희생은 희대의「부천서 성 고문사건」에 이어 또다시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추악한 범죄로 이제껏 침묵을 지켜온 「중간층」 에게 분노의 콧물을 터뜨리게 했다.
유난히도 길고 무더웠던 그해 여름 연일 자욱한 최루가스 속에 호헌을 고집하던「말기5공」치명타를 가하면서 6·29선언으로 이어져 제도권의 판도가 뒤바뀌고 미흡하나마 인권의 신장과 사회 각층의 다양해진 목소리가 우리 곁에 새 풍속도로 다가왔다.
87년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9호 조사실.
이날 아침 연행돼 수배 서울대생의 행방 등을 조사 받던 박 군이 조한경 경위(43)등 5명의 수사관에게 다리와 양팔을 잡힌채 욕조 물 속에 머리를 처박히는 잔인한 물고문 끝에 숨졌다.
중앙일보 보도에 이어『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최초 공식발표에서 『두 수사관의 가혹 행위에 의한 질식사』(1월19일),『5명에 의한 고문치사』(5월21일),『간부3명이 은폐·조작지시』(5월29일),『치안본부장이 직접 지시』(88년1월12일)등 네차례나 조작의 껍질을 벗은 끝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성명과 부검의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1년 만에야 전모가 드러난 5공 최악의 사건.『종철아 잘가 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말 없대이…』
한줌 재가 된 아들을 임진강에 뿌리며 울분을 삼키던 아버지 박정기씨(60)의 독백.
『가혹행위 있는 한 민주주의 없다』는 여론이 빗발치며 2월7일의 재야주최「범국민 추도회」와 49재에 맞춰 열린「3·3대 행진」등 인권회복 요구 시위가 전국에서 잇따라「민주세력」과「공권력」과의 대규모 도심 공방전이 시작된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4·13호헌 발표」가 기름을 부은 격이 돼「큰 불」로 번진 6월 항쟁은 6월9일 연세대에서 교내시위를 벌이던 이한열군(당시20·경영2) 이 최루탄 파편에 쓰러지자 절정을 맞는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파출소와 경찰버스가 시위대에 의해 불타고 최루탄과 돌·화염병이 매일 거리를 뒤덮은 채 수십만 군중에 의해「6·10」 「6·18 대화」등이 숨돌릴 새 없이 치러지며 급기야 6·29선언이 발표됐다.
하루아침에 시위가 멎고 평온을 되찾은 거리는 입원치료 27일만에 숨진 이군의 장례날인 7월9일 1백만명이라는 해방 후 최대의 시위인파로 또 다시 덮여「민중의 힘」을 보여주었다.
박군 사건은 넉달 만인 80년5월 국무총리·내무장관·안기부장 등 각료8명의 문책개각 등 대대적인 인사·징계의 회오리를 몰고 왔고 조 경위와 황정웅 경위(43) 강진규 경사(31)반금곤(46) 이정호(31)경장 등 고문경관 5명에 이어 조작지시를 한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치안감과 대공수사2단 유정방·박원택 경정이 구속됐다.
고문 경관 5명은 징역 3∼10년씩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며 박 치안감 등은 정년9월 집행유예로 풀려나 2심 계류 중으로 형 확정과 함께 파면을 앞두고 있다. 박 치안감은 지난해 정년퇴직, 신병요양 중.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곧바로 경질된 뒤 1년 만인 지난해1월 당시 국립 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 황적준 박사(42)의 은폐지시 폭로로 전격 구속됐으나 두달 뒤 서울 지법에서 「30년 공로가 참작」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 서울 아현동 자택에서 골프 등으로 소일하고있다.
황 박사는 폭로직후 사표를 내고 온갖 협박전화와 악성루머에 시달리다 못해 전화 번호와 집까지 바꾸며 1년반 동안 외로운 실직생활을 하다 올 가을 모교인 고대의대 교수로 임용돼 내년부터 후배들에게 법의학을 강의하게 됐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은 평범한 보통가정이던 피해자 박군 가족.
전 가족이 87년 여름 부산을 떠나 서울 염리동 박군의 형 종부씨(31·회사원) 아파트로 이사,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부산시청 수도국 말단직원이었던 아버지 박씨는 그해 6월 정년퇴직한 뒤 전국 민주화운동유가족 협의회(민지협)부회장을 맡아 최근 광주에서 있은 이철규 군 장례식까지 수백 차례에 걸쳐 전국을 다니며 거의 모든 시위·집회에 참가하는「노투사」로 변신했다.
아들의 죽음을 불치의 가슴앓이로 품은 어머니 정목순씨(57)는 1, 2살난 손자를 돌보며 일요일마다 박군의 가묘가 세워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을 찾는 것이 유일한 낙.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누나 은숙씨(26) 는 백기완씨가 회장으로 있는「민주열사 박종철 기념 사업회」의 총무부장으로 내년 초 창간될 월간지 『민중의 길』 준비작업 등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 3월 모란 공원안「열사 묘역」에 가묘를 세우고 초혼장을 지낸 가족들은 지난달 『국가 고문경관은 유족에게 1억3천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배상판결에 항소, 끝까지 투쟁을 계속키로 했다.『종철아 이 아부지도 이자는 할말은 하고 살끼대이…. 니는 이자 외롭지않대이』<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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