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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보수엔 "살인자"라더니 민노총엔 침묵…"집회도 내로남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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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또다시 위험에 빠트린다면 어떤 관용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22일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부 보수단체들이 ‘개천절 집회’를 예고한 시점이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공동체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의 삶을 무너뜨리는 반사회적 범죄를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옹호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3일 오후 종로3가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노동법 전면 개정 등을 요구하며 도로를 점거한 채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3일 오후 종로3가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노동법 전면 개정 등을 요구하며 도로를 점거한 채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3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약 2시간 동안 집회와 행진을 강행했다. 당초 집회 장소인 여의도를 경찰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통제하자 민주노총이 종로구에서 기습적으로 집회를 개최한 것이다. 집회엔 주최 측 추산 8000여명이 참석했다. 3일 기준으로 신규 코로나19 확진자가 743명 발생하고,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세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민주노총 집회에 대해선 집회 자제를 요청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집회 당일과 다음 날인 4일에도 민주노총 집회 관련 입장을 내지 않았다. 김부겸 국무총리가 지난 2일 민주노총 측에 집회 자제를 요청했을 뿐이다. 지난해 보수단체가 주도한 집회에 대한 대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보수단체가 주도한 광복절 집회를 앞두고는 대변인을 통해 서면으로 지시사항을 발표하고, “정부의 방역 노력과 국민 안전 및 건강이 일부 교회로 인해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심지어 노영민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해 11월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광화문 집회 주최 측을 향해 “집회 주동자들은 도둑놈이 아니라 다 살인자”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지난해 8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문재인 정권 규탄' 집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의 집회금지명령으로 집회 대부분이 통제됐으나, 전날 법원의 집행정지 결정으로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과 중구 을지로입구역 등 2곳에서는 개최가 가능해지면서 인파가 몰렸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문재인 정권 규탄' 집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의 집회금지명령으로 집회 대부분이 통제됐으나, 전날 법원의 집행정지 결정으로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과 중구 을지로입구역 등 2곳에서는 개최가 가능해지면서 인파가 몰렸다. 연합뉴스

야권은 이중잣대라고 비판했다. 야권 대선 주자인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일반 시민들의 집회에 대해서는 ‘살인자’라는 섬뜩한 말을 내뱉던 청와대가 민주노총 집회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무는 것이냐”고 따졌다. 유 전 의원은“민주노총에 얼마나 끌려다니면 방역 원칙대로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냐. 이 정권에서는 어느 편의 집회냐에 따라 대응도 차별이고 집회도 내로남불인 정권”이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이 민주노총에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민주노총이 정권 창출의 지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정설이다. 민주노총은 2016년 말 탄핵 정국당시 촛불집회를 이끈 핵심 세력중 하나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출범 초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촛불 청구서’를 요구했다. 정부는 2019년 12월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사면해 야당으로부터 “촛불청구서에 대한 결제”라는 비판도 들었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노총과 사이에서 갈등이 격화된 적도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걸핏하면 지지 철회를 내세우며 정부를 압박하는 바람에 번번히 정부가 물러섰다. 노무현 정부 때의 경험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위법 행위에는 법 집행을 엄정히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 후로 주 지지층인 노동계를 잃게 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무현 정부 때) 노정 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면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4월 15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아시아나케이오 하청 해고노동자 폭력 진압 문재인 정부 규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4월 15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아시아나케이오 하청 해고노동자 폭력 진압 문재인 정부 규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김부겸 총리는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엄중한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부의 거듭된 자제요청에도 불구하고, 불법 집회를 끝내 개최한 점에 대해 대단한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경찰청과 서울시는 확인된 위법행위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끝까지 책임을 물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대선 정국에서 사법당국이 민주노총에 대해 얼마만큼 제재를 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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