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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경기, 못 믿을 정부…'돈 꼬리표' 떼러 5만원권 금고 속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은행이 2009년 6월 23일 새로운 최고 액면 은행권으로 발행한 5만원권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2009년 6월 23일 새로운 최고 액면 은행권으로 발행한 5만원권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연합뉴스.

돈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불안한 경기 상황 속 커지는 세금 부담으로 '돈 꼬리표' 자르기에 나선 탓이다.

말 그대로 가장 많이 '잠수'를 탄 돈은 5만원 권이다. 1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분기 5만원권 발행액은 6조3238억원이다. 반면 시중에 유통되다가 한국은행 금고로 돌아온 5만원권 환수액은 1조2926억원에 그쳤다. 환수율은 20.4%다. 5만원권 10장을 유통하면 2장만 돌아온 셈이다. 5만권이 처음 발행된 2009년 6월 이후 1분기 기준으로 가장 낮다.

개인 금고나 장롱에서 잠자는 5만원권이 늘면서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5만원권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5만원권을 확보하는 게 녹록지 않다”며 “(그러다 보니) 고객이 창구에서 5만원권을 찾으면 만원권을 섞어서 드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장사 안되니 5만원권 유통도 뚝  

5만원권이 사라진 이유는 뭘까. 거래 수요는 줄고, 쟁여두려는(보관) 수요가 많아진 게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은행이 2019년 ‘5만원권 유통경로’를 추정한 결과 매출액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업종은 음식ㆍ숙박업종(18.6%)이었다. 제조업(2.2%)과 건설업(0.9%)과 격차가 크다.

말하자면 그동안 상당수의 5만원권이 식당 등의 자영업자를 거쳐 다시 은행으로 들어왔던 셈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자영업자의 손으로 흘러간 현금이 크게 줄어들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윤진하(34)씨는 “지난달부터 손님이 다시 늘어나 숨통은 트였지만 코로나19 직전과 비교하면 매출 타격이 크다”며 “2년 전만 해도 번 돈을 입금하려고 매주 은행을 찾았는데 요즘은 한 달에 2번 정도만 은행을 간다”고 말했다.

5만원권 환수율 추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5만원권 환수율 추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불확실성 커지자 현금 보관 수요 커지고

골드바(금괴)처럼 5만원권을 보관하려는 수요도 늘었다. 인플레이션(물가상승) 공포가 전 세계에 드리운 상황에서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 등 긴축 우려까지 겹치면서 안전자산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고액권인 5만원권은 교환 수단인 동시에 가치저장 수단으로 유용하다”며 “특히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자산가격이 급변동할 때 비상용 자금으로 5만원권 찾는 수요가 급증한다”고 했다.

고액 자산가들은 지난 3월부터 골드바와 함께 현금 보유 비중을 늘렸다는 게 은행권 프라이빗뱅커(PB)들의 공통된 답변이다. 현금 보유가 늘면서 덩달아 가정용 금고도 인기를 끌고 있다. 사라진 5만원권이 늘어날수록 잠적한 5만원권이 머물 집이 더 잘 팔린 셈이다.

서울 강남구 신세계백화점에 입점한 선일금고 매장 관계자는 “올해 들어 주요 고객층인 50·60대는 물론 혼수품으로 가정용 금고를 찾는 젊은 층도 늘었다”고 말했다. 매출도 늘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신세계·현대백화점의 가정용 금고 판매 매출액은 1년 전보다 55% 이상 뛰었다.

 올해 들어 가정용 금고를 찾는 소비자가 많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백화점 제공.

올해 들어 가정용 금고를 찾는 소비자가 많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백화점 제공.

현금 챙겼다가 자녀 생활비 주는 부자들  

5만원권의 몸값이 오르고 실종이 빈발하는 건 무엇보다 돈의 ‘꼬리표’를 뗄 수 있어서다. 5만원권은 수표와 달리 거래 내역을 남기지 않는 데다 만 원권보다 부피도 작아 보관에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자칫 자산 은닉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은행의 PB는 “과세를 강화하는 정부 각종 제도에 자산가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며 “(결국 이들은) 과세를 피하기 위해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금고에 보관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PB역시 “인출 금액도 금융정보분석원(FIU) 보고 대상인 1000만원을 넘기지 않도록 시간을 두고 최대한 쪼개서 돈을 뺀다”고 했다. 이뿐이 아니다. 5만원권은 자산가들 사이에선 사전증여 용도로 쓰인 지 오래다. 세무업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자산가들은 자녀의 월급은 저축하도록 하고, 부모가 생활비 명목으로 현금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고액권 품귀현상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10월 유로존에서 100유로 이상 환수율은 76.7%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96%) 19.3% 하락했다. 코로나19의 영향이다. 이처럼 경제가 불안할 때 고액권 환수율은 하락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100달러 환수율(82.6%)은 15%포인트 넘게 떨어졌고, 유로존(80.6%)의 100유로 이상 환수율도 8.7%포인트 하락했다.

고액권이 금고 등에서 잠자고 있는 현상이 이어지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중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개인에게 장기간 묶여있으면 금융권의 투자가 줄고 경제 활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염지현ㆍ윤상언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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