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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미술관 모셔요" 학연·혈연·지연···10곳 넘는 지자체 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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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건희 컬렉션'. 연합뉴스

'이건희 컬렉션'. 연합뉴스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전국 자치단체마다 학연·혈연·지연을 앞세워 유치전에 뛰어드는 가운데 일부 지자체는 삼성가와 조그마한 연관성만 있어도 그것을 앞세워 ‘러브레터’를 보내는 모양새다.

전국 10곳 넘게 유치전 뛰어들어 #여수 “이건희 생전에 자주 방문” #부산 “미술관 50% 수도권 편중” #유족, 기증 외 구체적 언급 없어 #문체부 “설립계획 다음달 발표”

미술관 유치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경남 의령군이다. 오태완 의령군수는 지난 3일 “기증의 의미를 잘 살려 많은 국민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이건희 미술관을 이 회장의 선대 고향인 의령에 유치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라며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지난 12일에는 의령군 정곡면 출신인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부자의 기업가 정신을 기리기 위해 호암 생가가 있는 정곡면 중교리 인근 도로에 ‘호암 이병철대로’라는 명예도로명이 붙여졌다. 정곡면 백곡리와 유곡면 신촌리 지방도 1011노선 중 12㎞ 구간이 대상이다. 의령읍 무전리와 정곡면 중교리 사이의 국도 20호선 9.4㎞ 구간에는 ‘삼성 이건희대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오후엔 ‘삼성 이재용 부회장 조기 사면 촉구 의령군민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병철 회장 생가 인근의 공영주차장에서 열린 행사에는 100여명의 군민이 참가해 이 부회장의 조기 사면을 촉구했다. 이를 두고 의령군 안팎에선 “최근 건립이 논의 중인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기 위한 프러포즈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지난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송봉근 기자

지난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송봉근 기자

 경남서부권발전 의령군협의회 주최 '삼성 이재용 부회장 조기 사면 촉구 의령군민 결의대회'가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고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인근 공영주차장에서 100여명의 군민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송봉근 기자

경남서부권발전 의령군협의회 주최 '삼성 이재용 부회장 조기 사면 촉구 의령군민 결의대회'가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고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인근 공영주차장에서 100여명의 군민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송봉근 기자

오태완 군수는 지난 12일 중앙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위해 선제적으로 호암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명예도로명을 부여한 것”이라며 “군민 결의대회가 열린 것도 이런 지역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은 지난달 30일 미술계가 처음 서울 ‘종로구의 송현동 부지’와 ‘정부서울청사’ 등이 적격지라고 주장하면서 불이 붙었다. 이후 박형준 부산시장 등이 ‘수도권 반대, 지방 유치론’을 들고나오면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대립양상을 띠면서 여러 지자체로 유치전이 옮겨붙었다. 현재까지 ‘학연·혈연·지연’에 ‘인연’까지 앞세워 공식 유치를 희망한 지자체만 10곳이 넘는다.

앞서 미술계 인사들로 구성된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준비위원회’는 송현동 부지에 미술관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삼성생명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매입한 적이 있는 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9월 개관 예정인 서울공예박물관과 연결해 문화예술클러스터로 조성하기에 좋다는 이유에서다. 정부서울청사는 한국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적 장소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에 관해 서울시는 “아직 송현동 부지의 구체적 활용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부산시의 행보도 분주하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 13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이건희 미술관 부산 유치 관련 기자회견를 열었다. 박 시장은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이건희 미술관은 당연히 서울이나 수도권에 들어서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문화시설 2800여개 중에 36%, 미술관은 전국 200개 중 50% 이상이 수도권에 편중돼 있어 문화예술 균형 발전이나 문화 분권 차원에서 봐야 한다”며 “그런 관점에서 이건희 미술관도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들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박 시장은 “부산 북항은 이건희 회장의 유지인 문화보국(文化保國)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장소이며, 현재 건설 중인 부산오페라하우스와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10일 오전 부산시청 12층 소회의실에서 취임 한 달 성과와 향후 과제 등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박형준 부산시장이 10일 오전 부산시청 12층 소회의실에서 취임 한 달 성과와 향후 과제 등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광주광역시와 대구시·수원시·용인시·진주시 등도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출생지나 묘소 위치, 출신 학교, 삼성 본사 위치 등을 근거로 들며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혈연·지연 관계가 약한 일부 지역은 ‘인연론’까지 들고 나왔다. 대표적인 곳이 전남 여수다. 여수에서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생전에 부동산을 샀을 정도로 애착을 갖던 곳”이라며 2012여수세계박람회장 부지가 이건희 미술관 적격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회장은 2006년 여수 소라면 일대에 ‘하트’ 모양 무인도인 ‘모개도’ 등 8필지 약 6만2000㎡의 부동산을 매입한 바 있다.

‘이건희 미술관 여수 유치위원회’는 지난 10일 “이 회장은 평소 여수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무척 좋아해서 여수지역을 자주 방문했고 소라면 일대의 섬과 대지를 직접 매입했었다”며 “ ‘이건희 미술관’ 여수 유치를 정부와 삼성, 그리고 유가족분들에게 간곡한 마음으로 요청한다”고 말했다.

전국 지자체들이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을 벌이는 것은 지역 문화 및 관광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4월 28일 이건희 회장 유족 측이 ‘이 회장 소유의 고미술품과 세계적 서양화 작품, 국내 유명 작가의 근대미술 작품 등 총 2만3000여점의 미술품을 기증하겠다’고 밝힌 뒤 아직 미술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것은 없다. 문 대통령이 “이 회장의 기증 정신을 살리고 좋은 작품을 국민이 감상할 수 있도록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 마련 방안을 검토하라’는 취지의 지시만 나온 상황이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기증품 관련 세부 공개 발표 간담회에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폴 고갱의 '무제(센강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기증품 관련 세부 공개 발표 간담회에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폴 고갱의 '무제(센강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미술품을 기증한 삼성 측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해 이를 반영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도 만약 기증자 측에서 이런 부분까지 위임했다면 이건희 미술관 유치경쟁이 지역 간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부 등이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이선우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가 중심이 되거나 아니면 미술관을 건립하고 싶어하는 쪽이 중심이 돼 미술관 건립 위치 등에 대한 기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투명성과 객관적인 기준을 통해 미술품의 관리 주체가 결정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는 다음달 쯤 ‘이건희 미술관’ 설립 계획을 공식 발표할 계획이다. 문체부 측은 미술관 신설 지역 선정 기준에 대해 ‘기증자 정신과 국민의 접근성’ 등 두가지 원칙을 중심에 놓고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체부 관계자는 "(미술관 입지는) 많은 사람이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기를 바란 기증자의 정신과 국민의 접근성 등 두 가지 원칙을 중심에 놓고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며 "수도권도 고려대상일뿐 확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의령·부산·여수·수원=위성욱·황선윤·진창일·최모란 기자, 최은경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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