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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건희 미술관’이 없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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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부산, 대구, 수원, 용인, 평택, 오산, 인천, 세종, 대전, 광주, 여수, 경주, 울산, 의령, 진주, 창원, 청주, 새만금개발청. 그것 아셨나요?  지난 한 달 사이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에 뛰어든 전국 자치단체가 20곳에 육박합니다. 분위기가 이쯤 되니 손들고 나서지 않은 곳은 마치 일하지 않는 곳처럼 비칠 정도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왜 강원도는 조용하냐’는 내용의 기사까지 나왔습니다.

지난달 28일 고(故)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이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을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과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 등에 기증하며 벌어진 상황입니다. 돌아보니 ‘이건희 컬렉션’ 기증 발표 뒤 문재인 대통령이 던진 한마디가 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를 볼까요. “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참모들에게 ‘이 회장이 미술품을 기증한 정신을 잘 살려 국민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소장처는 정해졌는데도, 이 말에 담긴 ‘별도의 전시실’ 혹은 ‘특별관’이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날개를 달고 전국 도시를 다 떠돌게 된 것입니다.

장욱진, 나룻배, 1951, 14.5x30cm, 판지에 유채.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나룻배, 1951, 14.5x30cm, 판지에 유채.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이 지역에 하트 모양 섬을 샀다”(여수) “삼성가(家)가 경주이씨 집안이다”(경주)등 각 도시가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기 위해 내세운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현 상황을 “지자체의 이건희 마케팅”이라고 요약하더군요. 그 이유라는 게 도시 관광 홍보문구와 같고, 발언 자체가 중앙 정부와 지역 유권자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 제스처라는 점에서요.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지역으로 끌어들여 경제를 활성화하고 싶다는 지역의 뜻을 모르지 않습니다. 문화시설이 서울에만 집중돼 지방 시민들에게 누적돼온 문화에 대한 갈증도 이해됩니다. 문화 예술 콘텐트의 위력에 대해 이의가 없는 이 분위기는 반갑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현란한 말 잔치 속에서 우리가 먼저 답해야 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이미 국박과 국현, 두 곳에 기증한 유족의 뜻은 어디로 갔습니까. 현재 각 도시에 있는 대표 미술관은 과연 어떤가요.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수준급 전시 기획을 위해 몸부림쳐온 지역 미술관의 노력에 자치단체는 그동안 어떻게 응답해 왔습니까. “제발 지금 있는 미술관이나 제대로 운영하게 도와달라”고 한 지역 미술관장의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이 드러낸 현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한건주의'입니다.  한 사람이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컬렉션'을 갑자기 끌어오기만 하면 그 지역이 절로 문화도시가 될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문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24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이건희 컬렉션’과 관련 미술관 신설 방침을 결정해 6월에 발표하겠다고 했습니다. 벌써 궁금해지는 것은 발표 이후입니다. 이건희 미술관 유치와 별개로, 문화의 중요성을 그토록 절박하게 깨달은 자치단체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함께 지켜봐야겠습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