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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세 차원의 생명, 보호 책임을 지닌 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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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미국에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세 분야의 전문대학원이 있다. 의과대학원, 신학대학원, 그리고 법학대학원이다. 이 세 분야가 지닌 공통점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라는 것이다. 의학은 육체적 생명, 신학은 정신적 생명, 법학은 사회정치적 생명을 다룬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세 차원의 생명 보호가 필요하다.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에 이 세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훈련을 받고 최소한의 성숙한 의식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어 공부해야 한다.

의학, 신학, 법학 분야는 #육체, 정신, 사회정치적 생명 관련 #세 차원의 생명보호 책임을 지녀 #공평한 정의 실천 위해 노력해야

사회는 여성들을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영원한 미성년자’로 간주하여 참정권과 교육권을 주지 않았다. 미국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 것은 1920년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전문대학원의 문이 열린 것은 한참 지난 후다. 미국 하버드대학교는 1636년에 설립되었으나, 여성에게 입학의 문이 열린 것은 설립 후 243년이 지난 1879년이다. 전문대학원은 어떤가. 하버드 의과대학원은 1782년, 신학대학원은 1816년, 그리고 법학대학원은 1817년에 설립되었다. 이 세 대학원에서 여성에게 문이 열린 것은 의과대학원 1945년, 법학 대학원 1950년, 그리고 신학 대학원 1955년이다. 의과대학원은 163년, 법학대학원은 133년, 그리고 신학대학원은 139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의학, 법학, 신학 세 분야의 관련자들이다. 생명보호의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오히려 생명 파괴의 행위를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의사, 판·검사, 목사 등으로 불리는 이 분야 관련자들이 한국 사회에 끼친 파괴적 영향은 객관적 수치로 드러내기 어렵다. 전공의들은 의사 수 증원 및 공공 의대 설립정책을 반대한다며 집단 휴진(파업)을 했다. 국가시험 거부까지 하던 의대생은 물론 전임의 의대 교수까지 파업을 했고, 전공의 파업 참여율은 80%에 달했다.

지난 3월 4일 “이 사회가 어렵게 쌓아 올린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사퇴한 검찰총장이 지휘하던 검찰은 정작 ‘정의와 상식’의 개념을 근원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전(前) 법무부 장관 가족의 일기장까지 파헤쳐 한 달에 1백만 건이 넘는 기사를 언론에 흘리며 한 가족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파괴하면서까지 ‘정의와 상식’을 실천하고자 한 검찰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사건들에 대하여는 눈 감고 있다. 위증을 연습시키며 증인을 매수하여 전 국무총리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파괴하는 일도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검사들이 룸살롱에서 받은 접대를 ‘96만원 접대’ 로 만들고, 전 검찰총장의 가족이 수십억의 허위증명서를 발급하고, 또는 땅 투기를 해서 100억 원의 이익을 챙겨도 이러한 ‘자기 식구’들 사건에는 관대하다. 그런데 기억할 것이 있다. 정의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사건에나’ 공평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그 진정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취사 선택적 정의 적용은, 정의의 이름을 빌린 ‘불의’일 뿐이다.

신학 분야는 어떤가. 2007년의 입법 시도 이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집단은 기독교다. 한국 기독교는 성소수자혐오, 난민혐오, 타종교혐오에 앞장서고 있다. 목회자 그룹은 청와대 앞에서 혈서까지 쓰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악법’이라고 반대했다. 또한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신학생과 목회자들을 정죄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기독교가 성소수자들의 정신적 생명은 물론,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까지 파괴하고 있다. 생명 사랑이 아닌, 생명 혐오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각 분야에서 묵묵히 생명 보호의 책임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다수의 물결에 합류하지 않고, “동료들의 미움과 저주를 감수할 용기”를 내면서 자신의 이득이나 권력의 확장이 아닌 ‘진정한 정의’의 실천을 위해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법조인들이 있다. 환자를 수익 환산의 도구가 아닌 소중한 생명으로 보면서, 자신들의 이득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실천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일하는 의료인들이 있다. 이러한 의료인들은 자신들만의 이득과 집단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위협하지 않는다. 또한 거대한 종교권력의 제도적 폭력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면서 평등과 정의를 확산하고자 헌신하는 종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지극히 소수다. 수적으로는 비록 소수이지만, 한국사회의 희망은 바로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 보호의 사회적 책무를 진정으로 실현하고자 애쓰는 이들 속에 있다. 인류 역사의 변화는 주류에 매몰되지 않고 생명보호를 그 우선적 책무로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가능했다. 이 소수들이야말로 보다 정의롭고 민주적인 한국을 만들기 위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이들이다. 그들과 연대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과 같은 ‘소수’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 이것이 암담한 한국 사회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몸짓이리라.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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