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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폐암 떠나보낸 임현식씨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마지막 열흘,아니 닷새만이라도 송추의 우리집 따뜻한 온돌방에서 지내다가 눈을 감게 해줬어야 했는데…. 그나마 중환자실에서 이것 저것 꽂고 외롭게 떠나지 않게 해준 게 다행입니다.”

지난달 4일 오후 일산 탄현 SBS스튜디오. 드라마‘작은 아씨들’ 마지막 회 촬영현장에서 만난 임현식(59)씨는 “너무 후회가 돼 그 사람이 떠난 후 몇날 며칠을 잠을 이룰 수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인 서동자(53)씨가 폐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지난 9월 29일 끝내 병원에서 운명을 달리 한 후 처음으로 응한 인터뷰 자리였다. KBS의 새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 첫 촬영으로 전날 밤을 거의 꼬박 샜다는 임씨는 “한 작품쯤 더 맡아서 정신없이 바빠야 (아내)생각을 좀 덜할 것 같다”며 “지금도 다 꿈인 것 같다”고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충격이 무척 크신 것 같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더 이상의 슬픔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어머니와도 각별한 모자지간이었다. 이북에 아직 살아계신 아버지(신문기자였던 임씨 아버지는 6.25때 월북했다)에게 보여주시려는 듯,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인 내게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신 분이다. 그런 분을 생활에 쫓겨 즐겁게 해드리지 못한 채 보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내에게도 결국 같은 후회를 하게 됐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내를 만나 27년을 살았다. 아내도 세 딸 교육 등으로 워낙 바빴지만 나도 배우로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다. 이제서야 출연작품을 줄이고 아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같이 하며 지내려고 했는데….”

-고인의 평소 건강은 어땠나.
“아내는 지난해 여름에도 사흘 연속 테니스를 쳤을 만큼 운동을 좋아하는 건강체질이었다. 그래서 가끔 허리가 아프고 쑤시다고 할 때도 무리하게 운동을 해서 그런 줄 알았다. 일상적인 건강검진은 다 받고 지냈는데 왜 병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계속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그랬더니 올해 1월 2일 결핵성 늑막염인 것 같다고 했다. 폐결핵을 앓았던 흔적이 있다고도 했다. ‘늑골에 물이 찼다’고 하길래 물만 빼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폐암 가능성이 있다며 최종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 말만 듣고도 난 혈압이 올라갈 정도로 당황했다. 아내에게 말하지 않은 채 기관지내시경 검사, 간검사 등을 했다. 결국 폐암 4기로, 간과 늑골까지 전이가 시작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고인에겐 언제 알렸나.
“혼자서만 끙끙 앓으며 폐암 전문의를 수소문했다. 결국 국립암센터를 소개받아 1월 29일 찾아가기로 했다. 그날 아침 아이들을 다 모이라고 했다. 같이 엄마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드리게 한 다음 준비했던 말을 했다. ‘지금 갈 곳은 ○○병원이 아니라 국립암센터’라고 했다. 기도까지 하고 좋아하던 아내의 얼굴은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난 빨리 치료하면 된다고만 얘기하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을 만나자 아내가 먼저 몇 기 암이냐고 물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즉시 ‘4기’라면서 ‘하지만 다른 이상은 없어 좋은 상태에서 치료를 시작하게 돼 다행’이라고 말해줬다. 난 사실 속으로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해준 것 같아 깜짝 놀랐다. 다행히 아내는 울지도 않고 담담해했다.”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했나.
“4~5개월 통원하며 항암치료를 받았다. 아내에게 ‘3년은 더 살 것’이라고 계속 ‘세뇌’시켜놨기 때문에 아내는 자신의 상태를 나한테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기만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와 함께 온 가족이 기도를 참 많이 했다. 성당은 물론 개신교에서도 신우회분들이 많이 와서 기도해줬다. 사실 아내에겐 시집 안 간 딸들 걱정이 가장 컸다. 암인 걸 알았을 때 ‘머리 빠지면 안되는데’하고 걱정했다. 언제 예식장에 나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머리가 아프다면서 구역질을 심하게 하더니 결국 쓰러졌다. 그래서 입원했다.”

-상태가 악화된 건가.
“수면 부족에 압박감으로 인한 우울증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거의 5~6일간 약과 주사로 잠만 재웠다. 그런데 그때부터 아내는 아주 이상해졌다. 말도 어눌하게 하고 애처럼 천진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이틀 정도 집에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예 포기하고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다시 상태가 나빠지자 겁이 나 병원으로 돌아왔다. 8월 중순쯤이었다. 병원에선 뇌압이 너무 올라간다고 했다. 척추에서 수액을 뽑아 검사를 하더니 암세포가 뇌로 전이됐다고 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제발 아내와 정상적으로 얘기 한번 해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까지 벌써 두달 가까이 아내와 두눈을 마주치고 얘기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수술 결과는 어땠나.
“뇌에 관을 꽂아서 물이 차면 뽑아 뇌압을 조절하도록 하는 수술이었다. 수술을 위해 아내의 머리깎은 모습을 봤을 땐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수술도 소용없었다. 20일쯤 지나니까 암이 자꾸 퍼져나간다고 했다. 뇌에서 뇌막염까지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그제서야 담당의사가 내게 ‘가망없다’고 했다. 아내는 독한 약 때문에 더욱 정신을 못 차렸다. 먹지도 못해 가슴부분에 관을 꽂고 영양제를 맞았다. 혈액 검사도 하루에 6번씩 했다. 폐렴 위험이 있다고 해서 물 한 모금도 먹일 수 없었다. 병원에선 최선을 다한 것이었겠지만 아내는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 됐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가망없다’는 말을 좀더 일찍, 두달 전쯤 해주고 ‘여기서 운명하게 하겠냐, 다른 방법을 택하겠냐’고 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좀더 품위있게 죽을 수 있게 해줬을 거다. 하지만 나중엔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병원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런 선택을 하도록 의사가 의무적으로 말을 해주는 시스템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그나마 처가 식구들과 상의해 일반병실에서 마지막을 맞도록 해준 게 다행이다. 50여일간 파죽음 상태에 있었던 아내를 중환자실에서 이것저것 꽂고 외롭게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임종은….
“온 가족이 모인 상태에서 내 품 안에서 죽었다. ‘죽어가는 사람도 청각은 살아 있어서 다 들을 수 있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에 그 전에 아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이런 저런 얘기 해주곤 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간병인을 내보내고 온몸을 마사지 해주면서 별의별 얘기를 다 했다. 그날도 아내에게 내가 눈물을 삼키며 끝까지 해준 말 중의 하나는 ‘여보, 당신 품위를 지켜야돼’였다. 딸들은 잠시 집에 쉬러 가 있었기 때문에 임종을 못했지만 그 전날 밤을 새면서 엄마에게 많은 얘길 했다고 한다.”

-고인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본 적은 있었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아내와는 어머니 산소에서 서로의 묘자리 얘기를 하는 정도 밖엔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송추의 우리 집에선 어머니 산소가 멀리 보인다. 아내가 암판정 받은 후에도 그 산소를 내다 보면서 저기에 우리 나란히 합장하자고 했다. 실제로 아내는 어머니 산소 옆에 묻었다. 그리고 아내가 나를 위해 들어놓은 보험이 서너가지 있다면서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몸이 좋아지면 하라’며 넘겼다. 하지만 이후엔 의식이 없어져서 다시 얘기 못했다.”

-암환자를 위한 시스템에 있어 무엇이 가장 문제라고 보나.
“암환자나 그 가족을 위한 체계적 시스템이 너무 부족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애쓰고 계신 분들께 죄송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암환자를 다루는 의사나 간호사들은 좀 특별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생명를 좌지우지하는 의사들은 환자나 보호자를 다독거리며 상담해줄 수 있어야 한다. 집단 상담은 별로 도움이 못된다. 담당의사가 아니더라도 하소연을 들어주며 차분히 상담해줄 수 있는 전문인력이 암환자 병동엔 정말 필요하다. 오죽하면 내가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를 붙들고 ‘우리 와이프 같은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하고 물어봤겠나. 초기 암환자도 좀 자세히 상담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환자에게 병 상태를 알려주는 건 좋지만 방법은 개인에 맞게 달라야 하는 것 아니냐. 성질이 급하거나 죽음에 강한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주는 건 무리같다. 의료계에서 이와 관련된 어떤 지침 같은 걸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가망없다’고 판단됐을 땐 좀더 솔직히 환자나 그 가족에게 얘기하고 품위있게 마무리할 기회를 줘야 한다.”

지난 8월 국립암센터에 1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던 임씨는 “그동안 암센터 병동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는 분들은 모두 동지였다”면서 “다른 환자와 그 가족들은 내 아내나 나같은 고통과 후회가 없길 간절히 바란다”며 쓸쓸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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