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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길 편하고 품위있게] 기계로 늦춰지는 죽음

중앙일보

입력

지난 9월 중순 서울대병원 응급실.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던 이모(84)씨가 구급차에 실려 왔다. 일년 전 식도암 판정을 받았던 그는 이번에는 심장을 둘러싼 막에 암세포가 퍼져 물이 찬 것이다. 이씨는 물 제거 수술 도중 상태가 더 나빠져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인공호흡기.인공신장.소변줄…. 이씨에게 10여개의 '생명줄'이 연결됐다. 혈압상승제 투여, 피 검사와 기관지 절개술, 혈액투석 등의 각종 시술이 행해졌다. 이씨는 생명줄에 의지하다 35일 만에 숨졌다. 이씨에게 이런 시술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명의 연장인가, 사망 시점의 연장인가. 이씨는 중환자실 신세를 안 졌으면 3~4일 만에 숨졌겠지만 며칠이라도 가족 품에 안겨 따뜻하게 세상을 떴을 것이다. 가족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고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생을 마감한 그였다.

소생 불가능한 생명을 무작정 늘리는 의료행위인 '연명 (延命)치료'. 현대의학의 산물인 이 행위는 의료 현장에서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생의 말년에 주로 찾아오는 암과 뇌졸중, 폐쇄성 폐질환, 심장병, 간경화, 패혈증 등 중증 만성질환으로 매년 20여만명이 죽어간다. 이들 가운데 얼마나 연명치료를 받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병원에서 인공호흡기 도움까지 받는 심각한 연명치료 대상은 3000명 정도로 의료계는 추정하고 있다.

◆ 연명치료의 그늘=지난 10월 초 간경화로 아버지(67)를 여읜 하모(41.회사원)씨는 아버지가 숨지기 직전 연명치료를 중단하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치료를 원했다. 고민 끝에 어머니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씨는 "아버지가 고통을 더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명 치료를 둘러싸고 가족 간 갈등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난 10월 말 서울 모 대학병원 암 병동에선 의식이 혼미한 말기 대장암 환자(61)의 보호자들이 "왜 중환자실로 보내주지 않느냐"며 고함을 질러댔다. "임종이 가까웠다"고 버티던 의사는 보호자의 성화에 못 이겨 연명치료에 들어갔다. 하지만 환자는 하루 만에 숨졌다. 보호자는 "환자의 동업자가 해외에서 돌아온 뒤 금전 관계를 정리하려면 최소한 사흘은 더 살려야 한다"며 연명치료를 고집했던 것이다.

서울대병원에서 35일 연명치료를 받은 이씨의 유족들은 1000만원 이상의 의료비를 부담했다. 건강보험 재정도 그 이상 들어갔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1999~2000년 4월 사망한 6만5300명의 진료비를 분석해보니 일년치 중 사망 직전 석달 간의 진료비가 58%나 차지했다. 서울아산병원 고윤석 중환자실장은 "부족한 중환자실 병상을 연명치료 환자들이 장기간 사용하다보니 정작 필요한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 문제점.대책=기도가 막혀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지난달 29일 타계한 김춘수 시인의 큰딸 영희(59)씨는 "집으로 모셔 임종하려 했지만 산소호흡기를 떼면 의사가 처벌받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는 "대법원이 올해 6월 치료 중단 의사에게 책임(살인방조죄)을 물은 '보라매병원 사건 판결' 이후 의사들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졌다"고 설명했다.

대한의사협회는 2001, 2002년 두 차례 소생 불가능한 환자의 진료 중단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진료 중단의 요건이나 과정을 정교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바람에 '소극적 안락사'로 몰려 유야무야됐다.

보건복지부는 현행 법령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치료 중단은 살인죄에 해당해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연명치료 중단의 취지를 사회가 똑바로 알고 보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과장은 "연명치료 중단은 진료를 완전히 중단하는 게 아니라 통증 완화 위주로 바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고 죽음을 맞게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권오정 교수는 "의사나 보호자가 환자에게 질병 상태를 정확히 알려주고 연명치료 여부를 환자가 미리 정하게 하는 '사전고지'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대만에서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특별취재팀=정책기획부 황세희.박태균 전문위원, 신성식.정철근.김정수 기자, 사진부 김상선 기자, 신창운 여론조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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