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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댄서 출신 ‘발레왕자’의 인생 3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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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백댄서에서 발레리노, 이어 지도자로 인생 3막을 시작한 ‘영원한 왕자님’ 이영철.

백댄서에서 발레리노, 이어 지도자로 인생 3막을 시작한 ‘영원한 왕자님’ 이영철.

2020년은 국립발레단에게도 힘든 시기였다. 팬데믹 때문에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고, 무용수들은 안팎으로 아픔을 겪었다. 발레단 수석 무용수 이영철은 그해를 보내며 결단을 내렸다.

이영철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은퇴 뒤 ‘발레 마스터’ 지도자 첫발 #스무살 늦깎이 입문, 연습으로 극복 #“결정 어려웠지만 내려놓기 연습”

올해 마흔셋. 무용수로서 기로에 서는 나이다. 기량은 성숙했지만 체력이 저하되는 시기여서다. 결국 그는 ‘무용수’ 타이틀을 내려놓고 지도자인 ‘발레 마스터’로 첫발을 내디뎠다. 대중가요 가수의 백댄서로 활동하다 스무살에 발레를 접한 뒤 승승장구해온 그로선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그의 후배 사랑은 발레단에선 워낙 유명하다. 이영철이 무대에 서지 않는 국립발레단 공연을 가면 객석에선 으레 ‘브라보’라는 환호가 우렁차게 울리곤 했다. 바로 이영철의 목소리다. 후배 사랑이 각별한 그를 눈여겨본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은 수년 전부터 그에게 발레 마스터 자리를 제안했다고 한다.

첫 수업을 진행한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타이츠와 슈즈 대신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백댄서에서 발레리노, 이젠 지도자로서 제3의 인생을 막 시작한 그의 심경을 물었다.

스무살에 발레를 처음 접하고 국립발레단 주역이 되다니 기적에 가깝다.
“백댄서를 하면서 친한 형들이 ‘춤 기본기를 다지기엔 발레가 최고’라고 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똑같은 춤인데 백댄서인 나는 어른들이 혼을 내고 발레리노인 나는 환호하는 게 재미있더라. 어린 시절엔 언더팬츠(발레리노들이 착용하는 하의)도 어색하고 발레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다.”
그러다 세종대에 입학했는데.
“진짜 우연이었다. 선생님도 ‘넌 안 될 거야’라고 했고. 진짜 잘하는 애들은 어떤지 구경이나 하려고 시험을 쳤다. 시험 당일 다들 너무 잘하니 주눅이 들어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당시 조교 선생님이 일어나라고 했고, 용기를 내 시험을 봤는데 덜컥 붙었다.”
발레 천재였던 거 아닌가.
“전혀. 은사님들이 아니면 난 바로 사라졌을 거다. 학교 다닐 때도 기본기가 워낙 없으니 제일 못했다. 선생님들께서 그런 나를 제일 앞줄에 세우시더라. 창피하니까 연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연습실 열쇠를 몰래 복사해 새벽 2~3시까지 연습했다. 발레는 기본 동작인 탕듀(tendu·발을 옆으로 내밀기)부터 플리에(plie·발꿈치끼리 붙이고 서서 무릎을 굽히기)를 수만번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근육이 서서히 각성하면서 계단식으로 발전한다. 정직한 예술이다. 그러다 콩쿠르에서 상을 받기 시작했고, 자신감이 붙었다.”
국립발레단에 스카우트된 뒤 슬럼프가 왔는데.
“갈라 공연에선 얼추 괜찮은데, 전막 공연에선 기본기 부족이 다 드러났고, 결국 3년 정도 하다 그만뒀다. 러시아로 유학을 가려다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이 불러주셔서 갔다가 국립발레단에서 객원으로 다시 활동했다. 그러다 주역 무용수 부상으로 대역 기회를 받았고, 다시 주역으로 뛰게 됐다.”

지난해 12월 ‘호두까기 인형’으로 고별무대를 준비했지만 팬데믹으로 공연이 취소된 건 발레 팬들에겐 큰 아쉬움이다. 그러나 이영철 본인은 “은퇴 결정이 쉽지 않았던 만큼 매 순간이 ‘내려놓기’를 연습하는 과정이었다”며 “무대에 서는 것도 좋았겠지만 혼자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고 말했다. 오는 29일엔 『발레리노 이야기』(플로어웍스)도 출간한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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