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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담겨야 '고향의 장맛'

중앙일보

입력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는데 제대로 장을 담가 본 적이 없어요. 어릴 시절 장 담그는 날이면 고추장을 버무리려고 만든 밀가루 풀을 맛있게 먹던 기억은 있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결혼 초기에 몇 차례 장을 담가 본 경험은 있지만 자꾸 벌레가 생기거나 곰팡이가 피어서 그만뒀어. 그 땐 장 항아리에 버섯 모양을 오려 거꾸로 붙이기도 했었어."

차장을 넘어 들어오는 햇살은 봄 기운을 품고 있지만 창을 열면 채 가시지 않은 겨울 공기가 느껴지던 지난달 28일. 이행순(38).주은실(48)주부는 자동차가 고속도로 서안동 톨게이트를 나와 호젓한 시골길로 들어서자 장 담그던 경험과 추억들을 떠올린다.

두 사람은 경기도 분당의 같은 아파트에 산 인연으로 나이차를 뛰어넘어 10년 넘게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 지금 새벽밥을 지어 먹고 경북 청송군 중평리 산골 마을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는 전통 된장과 간장을 만드는 제조업체 맥꾸룸이 자리잡고 있다. 자신들이 몇년째 사먹고 있는 업소의 현장에 가서 장을 실제 담가보면서 맛내기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분당을 떠나 4시간 반만에 도착한 맥꾸룸의 앞마당엔 빈 항아리 몇 개만 달랑 엎어져 있을 뿐이다. 수백~수천 개의 장 항아리가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습과 전혀 딴 판이었다.

"우리집 장 항아리는 모두 비닐 하우스 안에서 있어요. 메주 속의 미생물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관리하거든요. 벌레나 먼지 같은 이물질도 막을 수 있어요." 성명례 사장의 설명이다.

성사장이 비닐 하우스로 안내해 출입문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메주콩 2~3가마가 족히 들어갈 만한 큰 항아리 수백 개가 가지런하게 자리하고 있다.

수십년간 장을 익혀온 연륜이 느껴지는 오래된 항아리도 있다. 항아리 입구를 씌운 하얀 면 보자기는 다른 미생물이 감히 접근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깔끔하다.

"장 담그는 비법이라고 특별한 것이 없어요. 미생물도 살아있는 생물로 생각하고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밖에요. 하우스별로 작업자 한 명이 배치돼 장 항아리 하나하나를 매일같이 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한답니다."

된장찌개를 잘 끓이기로 소문난 이씨가 "이 집 된장이 나의 비법"이라며 추켜세우자 고추장 찹쌀 풀을 준비하던 성사장이 더욱 신바람 나서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장 맛은 메주.항아리.물.소금이 결정하는데 메주는 겨우내 잘 띄운 것을 골라야 한다는 등. 겉이 누렇게 말라 있지만 속은 약간 말랑말랑한 것, 희고 노란 곰팡이가 많이 핀 게 잘 뜬 메주란다. 샘플을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항아리는 오랫동안 쓰던 것이 좋다.

소금은 천일염을 녹여 3일간 묵혔다가 윗물만 걸러서 쓴다고 한다. 좀처럼 밝히기 꺼리던 노하우가 하나씩 나오는 셈이다. 항아리 뚜껑을 열고 장 맛을 보던 이씨가 도시에서 담근 장이 시골 장보다 맛이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도시의 아파트 베란다를 봅시다. 꽉 막힌 밀폐된 공간에 난방은 많이 해 무척 건조하죠. 게다가 창문을 열면 매연에 찌든 공기가 들어오고…. 사람도 숨이 막히는 판국인데 미생물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겠어요."

성사장은 이곳에서 담근 장을 서울 집으로 옮겨 띄웠더니 제 맛이 안나더라고 했다. 도시에선 그만큼 장을 담그고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나무주걱으로 고추장을 버무리던 주씨가 "고추장을 띄우다 보면 색이 검어지고 흰 곰팡이가 피어나며, 간장이 분리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하소연한다.

성사장은 "보통들 떠내 버리지요. 그러지 말고 마른나무 주걱으로 장을 뒤집어 잘 다독거려 놓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장의 표면이 말라버리는 경우엔 간장을 살짝 부어 두면 괜찮아진다"는 조언도 곁들인다.

성사장은 "파는 장은 가장 맛이 있을 때 시중에 내놓은 것이므로 오래 두고 먹으면 맛이 떨어진다"며 "한꺼번에 1년치씩 사지 말고 3개월 안에 먹을 만큼만 구입하라"고 조언했다.

'우리 된장은 국내 최고의 명품 된장'이라는 자부심으로 외부인에겐 제조과정을 절대 공개하지 않던 곳이다. 이곳에서 '단골'이란 명분으로 특별한 장 담그기 체험을 한 이씨와 주씨. 돌아오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산골 된장같이 구수한 맛이 느껴지는 장의 추억을 계속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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