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산업부, 설명과 협박 사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정부부처는 기사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해명자료를 낸다. 설명자료나 반박자료란 이름으로 배포하기도 하는데 형식은 엇비슷하다. 먼저 문제 삼은 기사 내용을 요약해 적은 다음 부처 입장을 붙인다. 이어 ‘사실과 다르니 보도에 신중을 기해 달라’거나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 같은 문구로 마무리한다.

지난달 30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설명자료 하나를 배포했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혐의를 지적한 본지 칼럼을 문제 삼았다. 형식은 이전 설명·해명자료와 같았지만 내용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제목부터가 남달랐다.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는 조작되지 않았음’. 산업부는 감사원의 감사 보고서엔 ‘월성 1호기 경제성이 불합리하게 낮게 평가됐다’란 표현만 있을 뿐 ‘경제성 조작’이란 문구는 없다고 반박했다. 이 설명자료의 가장 큰 문제는 마지막 문장에 있었다. “향후 산업부는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가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기사에 대해선 언론중재위원회 신청 검토 등 적극 대응할 계획”이라고 했다.

노트북을 열며 11/19

노트북을 열며 11/19

언론중재위는 ‘위원회’란 이름을 달고 있긴 하지만 법원에 준하는 기관(준사법기구)이다. 언론중재위의 조정·중재는 재판(화해)과 같은 효력이 있다. 산업부의 설명자료는 앞으로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가 조작됐다고 쓰는 기자가 있다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정부부처가 낸 수없이 많은 해명자료 속에서도 이런 문구는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언론중재위로 갈만한 사안이라면 바로 행동으로 나서지 이런 예고성 협박은 보통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뒤져 비슷한 사례를 하나 찾긴 했다. 2016년 11월 7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낸 해명자료다. “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을 조윤선 장관이 주도했다는 기사는 명백한 오보”라며 “이에 대한 언론중재위 정정 보도 청구를 포함한 법적 대응을 적극 검토 중”이란 내용이었다. 1년여 후인 2018년 1월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은 블랙리스트 작성·관리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누구의 판단이었든 설명자료로 포장한 협박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산업부의 설명자료가 나온 이후 지금까지도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이란 문구가 담긴 기사는 수천 건 넘게 쏟아지고 있다. 고발이나 중징계 없는 감사원의 감사 결과 역시 면죄부가 아니었다. 지난 5일 검찰은 산업부 등을 압수수색하며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혐의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에 돌입했다.

법으로 보장한 정정·반론권을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목적으로 악용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한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