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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직도 박상원처럼 보이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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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7~29일 1인극 무대에 서는 배우 박상원.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 표현을 위해 ‘박상원인지 모르게 하는 것’이 목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7~29일 1인극 무대에 서는 배우 박상원.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 표현을 위해 ‘박상원인지 모르게 하는 것’이 목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중구의 남산예술센터 지하 연습실. 커다란 벽에 붙은 종이에 그날의 일정이 손글씨로 쓰여있다. ‘오전 11시~오후 1시 더블베이스 연습, 오후 2시까지 점심, 오후 4시까지 공연 리허설, 5시까지 안무 연습’.

7일부터 1인극 ‘콘트라바쓰’ 공연 #안경, 덥수룩 수염, 헝클어진 머리 #40년 연기해온 반듯함 탈출 기회 #“발가벗고 무대 오르는 게 연극”

쉬는 시간이 없는 스케줄은 배우 박상원(61)의 것이다. 그는 오는 7일 시작하는 연극 ‘콘트라바쓰’를 준비하고 있다. 더블베이스를 배우고 연습하는 건 극에서 이 악기를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습도 바뀌어있다. 뒷목을 덮은 머리카락은 나풀거리고, 수염도 길도록 내버려 뒀다. 안경도 썼다. “대학교 이후 머리도 처음 길렀고 수염도 처음, 안경도 처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박상원인 줄 몰라본다. 내 계획이 통했다!”

박상원을 없애는 것이 ‘콘트라바쓰’ 공연의 첫 목표였다. 박상원은 ‘여명의 눈동자’(1991)의 장하림, ‘모래시계’(1995)의 강우석으로 기억된다. 의대생이고 검사였다. 반듯하고 침착한 엘리트, 그게 박상원의 이미지였다.

이번에는 그 반듯함을 지워야 한다고 했다. 최대한 박상원 같지 않아 보이려는 노력이다. “머리도 여기 정수리에 숱이 더 없어지게 좀 솎아내고, 의치도 끼려고 했다. 옷도 뒤에 좀 구멍 난 것처럼 하자고 했더니 무대 스태프들이 ‘아, 그렇게까지는…’이라며 말리더라.” 망가지기로 작정한 건 고독하고 외로운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내밀한 감정에 주목하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 『콘트라바스』(1981)는 오케스트라 맨 뒷줄에 앉은 베이스 연주자의 독백이다. 커다란 악기와 단둘이 외롭게 살아가면서,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도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더블베이스라는 중요한 악기를 하찮게 취급하는 세상을 원망한다.

“이 역을 하기로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그러더라.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겠냐고. 지금까지 다 잘 되기만 했던 사람 같다고. (웃음)” 박상원이 박상원처럼 보이지 않으려 하는 건 이런 생각 때문이다. “TV 드라마 이미지로 나를 많이 기억한다. TV의 연기는 박상원에 그 캐릭터가 들어오는 거다. 하지만 무대 연기는 박상원 스타일을 그 캐릭터로 가지고 들어간다. 나를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장르가 연극이다.”

연기도 연극에서 시작했다. 재수 시절인 1977년 오태석 연출의 1인극 ‘약장사’를 이호재의 무대로 봤고 이듬해 서울예술대학에 입학했다. “한 사람이 두시간 동안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기적 같은 일이 신기했다. 언젠가는 해보려 마음먹었다.” 졸업 후 박상원은 1988년 ‘인간시장’으로 TV 드라마를 시작했고 특히 ‘모래시계’로 일약 스타가 됐다. 그는 “‘여명의 눈동자’‘모래시계’ 끝나고, 그 바쁜 시절에도 꼭 연극이나 뮤지컬을 했다. 나만큼 쉬지 않고 무대를 한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했다. 1979년 연극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 시작해 2010년 ‘레인맨’, 2014년 ‘고곤의 선물’ 등 기회가 될 때마다 연극을 했다. 이번 ‘콘트라바쓰’는 6년 만의 연극 복귀이고, 연기인생 최초의 1인극이다. “처음 봤던 이호재 선생님의 ‘약장사’ 기억 때문에 결국 1인극으로 오게 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또 “TV에서 안 찾으면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무대 작업을 시작하려 했는데 지금 많이 안 찾는다”고 덧붙였다.

박상원은 무대 연기에 대해 “발가벗고 올라가는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무대는 TV 드라마와 달리 기록이 되지 않는다. 더욱 솔직하게 역동적으로 올라간다.” 깔끔한 이미지로 TV에 기록되는 대신 망가져도 되는 해방감을 주는 곳이 무대라는 얘기다. 또 “연극은 고향 같다”고 했다. “스무살부터 먼지와 땀 총량의 법칙을 익히며 연기를 했다. 공연장 쓸고 닦기부터 하면서 마신 먼지만큼, 공연장 유령처럼 살면서 흘린 땀만큼 연기가 된다는 신념이었다. 그 신념을 다시 가지게 되는 게 행복하다.” 박상원은 서울예술대학교 연기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40년동안 익힌 법칙을 전한다.

이번 무대는 3년 동안 준비했다. 2017년 기획을 시작했지만 미뤄지고 취소되던 중 가까스로 무대에 올리게 됐다. 박상원은 “연극을 3년 준비한다는 건 블록버스터급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무대엔 혼자다. 한 시간 반 동안 혼자 대사를 하고 춤을 추다가 베이스 연주까지 한다. 브람스부터 바그너까지 갖가지 음악이 흐르고 박상원은 베이스라는 악기와 음색, 음악을 설명하며 무대를 누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데, 주고받는 대사 없이 혼자 하는 연기가 정말 힘들다. 혼자 종합운동장 뛰는 것 같은데 기합도 아니고… 지옥 같다.” 연극을 “고통의 작업”이라 부르는 그는 40년 전 품었던 1인 극 연기의 환상으로 이 과정을 견딘다.

3년 준비하며 베이스 연주 실력도 늘었다. 지난해엔 경기도의 한 무대에서 활을 쓰지 않고 현을 튕기기만 하는 주법으로 무대 연주도 했다고 했다. “솔레솔라 열다섯번, 그다음엔 열두번 이런 식으로 다 외워서 했다. 같이 연주한 사람들이 기절했다”고 했다. “연극 대본 외우던 힘으로 외운 듯하다”던 그는 “사실은 악보를 못 본다”고 털어놓고 웃었다. ‘콘트라바쓰’ 공연은 오는 7~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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