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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권투로 확 날려

중앙일보

입력

거친 운동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이들이지만 샌드백을 쳐댄 지도 10년이 지났다. 살빼기.스트레스 해소… 전문직 일을 하는 사람에겐 좋은 점이 많다.

그러나 사각링 위에서 느끼는 철저한 고독, 이것이 두 사람이 꼽는 권투의 진짜 매력이다.

#1R-음악가와 한의사, 링에서 만나다

땡!

네. 종이 울린 순간 링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두 사람, 벌써부터 눈에서 불똥이 튀는군요. 여기는 서울 신촌의 라이온스 복싱 체육관, 10년째 권투를 해온 음악가 최중원씨와 한의사 이민영씨가 처음 맞붙는 자립니다.

이민영 선수 한번 훅을 날려보지만 거리가 짧군요. 이 선수는 저 멀리 종암동 '변정일 체육관'에서 원정 경기를 왔습니다. 마흔다섯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육이 탱탱하군요.

네, 홈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최중원(53) 선수,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려보네요.

아, 역시 발빠른 이민영 선수가 간발의 차로 피하네요. 최중원 선수 요즘 바순 연주하느라 연습이 좀 뜸했나요.

평소 장기였던 원투 스트레이트가 힘을 쓰지 못하네요. 웨이브진 앞머리, 곱상한 얼굴, 무척 예술적인 모습! 아, 이게 웬일입니까.

경기를 하는 건지 폼을 잡는건지 두사람 서로 원을 그리며 눈치만 살피고 있습니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아서일까요.

땡!

네, 1회전 3분 경기가 벌써 끝났네요. 막간을 이용해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최중원 선수를 만나보죠. 최 선수는 서울대 음대를 나와 현재 서울시향 바순 수석연주자로 재직 중입니다.

원래 운동을 좋아해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유도.합기도 등 닥치는 대로 배웠다는 최선수, 10년 전 권투를 접한 후로 다른 운동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왜 하필 권투였습니까?

"권투요? 테니스보다 세배는 땀을 많이 흘리니 살찔 염려 없고,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하니 보는 눈과 감각이 빨라져요. 샌드백 한 1백번 두드리다 보면 스트레스도 화악 달아나고…. 무엇보다 폐활량이 좋아져 연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요."

아하, 그러나 음악하는 사람이 격투기 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은데요. 바순을 불기 위해선 입과 손을 보호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로 '쉐도 복싱'을 많이 합니다. 내 앞에 상대방이 있다고 가정하고 공격과 방어 시나리오를 짜가며 혼자 연습하는 거지요. 거 왜 권투와 마라톤은 '고독과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주가 없는 시간에는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아 두시간씩 저 자신과 싸움을 벌이곤 하지요. 앗,2회전 시작하나 봅니다."

땡!

#2R-권투 10년, 몸이 달라지다

2회전 시작됐습니다. 다시 링으로 돌아간 두 선수, 이제는 제법 몸이 풀렸는지 발놀림이 무척 빨라졌습니다. 권투는 힘으로 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온몸에 힘을 빼고 가볍게 다가가 전체 몸무게를 이용해 주먹을 날리는 것이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건 권투의 기본인 듯합니다.

기회를 노리던 이민영 선수, 주특기인 어퍼컷을 날려봅니다. 턱을 비스듬히 맞은 최중원 선수 비틀, 인터뷰 때 너무 말을 많이 해 지쳤나요. 고개를 몇번 흔들며 다시 전의를 다지네요.

땡!

2회전은 이민영 선수가 조금 앞선 것 같습니다. 기세등등한 그를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백산한의원 원장인 이 선수는 인근의 '변정일 복싱 체육관'에서 10년 넘게 권투로 몸을 다졌습니다.

권투 국제심판 자격증도 갖고 있다고 하네요.

1998년 WBA 산하 아시아지역권투협회(PABA) 심판 자격을 획득해 지금까지 22번이나 링 위에 섰습니다. 환자 보랴, 매일 저녁 권투 연습하랴 힘들텐데 심판까지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약골이라 콤플렉스가 심했습니다. 고교시절 유도를 배웠지만 제 체질에는 맞지 않더군요. 대학 입학 후 학교 앞 헬스장에 다녔는데 거기서 샌드백 갖고 연습하는 복싱 선수에게 곁눈질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이 될 생각은 어떻게 한 겁니까.

"스물다섯살 때인가, 우연히 미국에서 열린 권투 경기를 TV 중계로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미 연방판사가 주심을 보는 거예요. 야, 미국에서는 권투 심판이 명예로운 자리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국내에선 심판이 되기가 무척 힘들다고 하던데요.

"어렵죠. 선수 출신에 우선권이 있고 결원이 생기면 보충하는 식이라 언제 뽑을지도 잘 몰라요. 그래서 혼자 준비했죠. 경기장에서 부심 뒤에 앉아 채점도 해보고 경기 장면을 녹화해 공부도 했어요. 그러던 차에 98년 WBA 산하 아시아권투협회가 새로 생기면서 심판 자격을 획득했죠."

아까 최선수에게도 물어봤는데요, 권투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원시적이고 수컷 냄새가 납니다. 더구나 링 위에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아요. 나혼자 해결해야 하는 절박함, 그 상황이 피가 끓고 흥분하게 하죠."

땡!

#3R-권투는 예술? 혹은 과학?

마지막 3회전. 경기보다 인터뷰에 힘을 써 두 선수 모두 지친 모습! 중년의 나이에서 오는 체력의 한계인가요. 안타깝네요. 아, 2회전 때 어퍼컷을 당했던 최중원 선수 회심의 스트레이트를 날려봅니다.

왼쪽볼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이선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집니다. 최 선수를 지도하는 마관장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집니다. 역시 손은 안으로 굽는 법이지요.

땡!

경기 끝났습니다. '신촌파' 최중원 선수와 '종암동파' 이민영 선수, 서로 장갑을 부딪치며 인사를 나누네요. 오늘 경기 결과는 무승부인 것 같네요. 링 밖으로 나온 두선수,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가요.

"스트레이트.훅.어퍼컷 이 세가지 기본 동작으로 수만여가지 배리에이션(변주)이 가능하죠. 악기 하나로 모든 곡을 소화하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최중원)

"권투는 몸 전체가 유연해야 하기 때문에 근육이 부드러워지고 순간적인 힘을 쓰면서 근육에 힘이 실리지요. 얼마나 과학적인 운동법입니까."(이민영)

직업은 속이지 못하는 법인가요. 음악가인 최선수의 눈에 복싱은 '예술'이고 한의사인 이선수의 눈에는 '과학'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여러분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가까운 권투 체육관으로 가보세요. 구수한 땀냄새 속에 삶의 새로운 무대가 펼쳐지는 걸 느낄 겁니다. 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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