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법안 발의 4년간 2만건 한국 국회, 건당 심사엔 고작 13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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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깨 걸기’란 말이 있다. 서로 어깨에 팔을 얹어 끼는 행위를 뜻한다. 여의도에선 다른 의미도 있다. 의원총회가 열릴 때 자신의 주변에 앉은 의원 10명에게 법안을 보내 발의용 서명을 받는 걸 말한다. 과거엔 의원 전원에게 혹은 같은 당 의원들에게 보냈고 서명을 받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세계서 가장 많이 입법하는 한국 #지난 국회 나왔던 법안 재탕도 많아 #“사회 아닌 의원 위한 입법” 비판론 #공동 발의 기억 못해 반대하기도

#2. 21대 국회 들어서자마자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이 ‘대표발의 1위’로 화제가 됐다. 6월 1일부터 8일간 20건을 냈다. 대부분 재탕이었다. 이 의원은 “지난 국회에서 논의가 안 돼 재발의했다”고 해명했다.

‘일하는 국회’가 돼야 한다고들 말한다. 입법 통계만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입법하는’, 열심히 일하는 국회다. 그러나 가장 좋은 입법을 하는 나라인지는 이처럼 애매하다.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경향성 때문이다.

14일 국회미래연구원이 발간한 ‘더 많은 입법이 우리 국회의 미래가 될 수 있는가’(박상훈 초빙연구위원)에 따르면 지난 20대 국회 기준으로 의원당 4년 평균 80.5건의 법안을 냈고, 이 중 29.3건이 법안으로 반영됐다. 주요국과 비교해 압도적인 ‘생산성’이다. 미국이 그나마 근접한 국가인데 40.6건을 냈다. 하지만 처리된 건 1.4건에 불과했다. 영국·프랑스·독일·일본 의회는 한참을 밑돈다. 특히 영국의 경우 각각 0.9건, 0.2건이다. 의원 한 명이 4년간 간신히 법안 한 건을 낸다는 얘기다.

개원 4개월 동안 입법 현황

개원 4개월 동안 입법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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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는 더할 것이다. 20대에선 의원 발의만 2만 건(2만3047건)대였는데, 이번엔 3만 건 돌파도 가능해 보인다. 개원한 해의 10월 2일 기준으로 20대 때 2376건이던 의원 발의 법안 건수가 이번 국회에선 3928건으로 1.7배 는 것을 보면 말이다.

법안심사소위 활동을 늘렸다곤 하나 양적 팽창을 따라잡긴 역부족이다. 17대 때 법안심사소위에서 상정 법안을 심사한 시간이 평균 22.7분이었는데 20대 때엔 13.1분으로 줄었다. 접수 법안 기준으론 더 옹색하다. 같은 기간 21.2분이던 게 6.6분이 됐다. 박 연구위원은 “어느 한 의원이 하루 4시간씩 1년 300일 동안 동료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한 건당 15분 정도 읽고 검토한다고 할 때 그것만으로도 5년이 걸릴 정도의 분량”이라고 썼다. 의원 임기가 4년인 걸 감안하면 일부 의원은 의원직을 잃고도 1년을 더 읽어야 한다는 ‘희비극’적 상황이다.

법안소위에서 법안 심사에 들인 시간

법안소위에서 법안 심사에 들인 시간

이래서야 제대로 된 법안이 만들어지기도, 또 한번 만들어진 법안이 오래갈 것이라고 믿기도 어렵다. 법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법적 안정성을 기대하기 난망하다는 의미다.

보고서엔 현 상황에 대한 의원·보좌진의 개탄도 담겨 있다.

주요국 의회와의 입법 실적 비교

주요국 의회와의 입법 실적 비교

“사회가 필요로하는 법이 아니라 의원들을 위한 법 만들기가 우리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20대 상임위원장 출신 의원)

“의원과 함께 의회정치를 이끈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나 점점 입법 기술자가 되는 느낌이다.”(16년차 보좌관)

“사전에 법안을 검토하고 공동발의하는 일이 이제는 정상이 아니라 예외가 돼가고 있다. (중략) 의원 자신이 공동발의하고도 그 사실을 잊고 상임위 표결에서 기권하거나 반대하는 웃지 못할 사례도 종종 있다.”(12년차 보좌관)

더 많은 입법만이 우리 국회의 미래여선 안 된다.

고정애 정치에디터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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