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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면부지 20대 백혈병 환자에 ‘2만분의 1’ 사랑 실천한 부기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평생 연락이 안 오기도 한다는데 10여년 만에 처음 연락이 온 것이라 정말 기뻤습니다.”

대학생 시절 기증 희망자로 등록, 12년 만에 조혈모세포 기증

대한항공 부기장인 민경일(34)씨는 지난 6월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민씨의 유전자와 일치하는 혈액암 환자가 생겼고 그의 조혈모세포가 필요한데 기증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전화였다. 민씨가 대학생이던 지난 2008년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로 등록한 지 12년 만이다.

최근 20대 백혈병 환자에 조혈모세포를 기증한 대한항공 부기장 민경일(34)씨. 사진 민경일씨 제공

최근 20대 백혈병 환자에 조혈모세포를 기증한 대한항공 부기장 민경일(34)씨. 사진 민경일씨 제공

조혈모세포는 백혈구·적혈구·혈소판 등 혈액세포를 만들어내는 모(母) 세포다. 조혈모세포 이식은 백혈병 같은 혈액암 환자의 생명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다. 이식하려면 환자와 기증자의 유전자형이 맞아야 한다. 이런 확률은 가족의 경우 부모 5%, 형제자매 25% 정도이지만 타인과의 일치율은 수만 분의 1로 확 떨어진다. 기증 희망자가 많아도 대부분 환자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유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차에 받을 환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이 와 아내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다. 민씨는 “‘사람 살리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지’ 라는 아내의 응원과 ‘기도로 응원할게’라는 부모님의 격려로 망설임 없이 기증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대한한공 부기장인 민경일(34)씨가 지난 달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조혈모세포를 채집하고 있다. 사진 민경일씨 제공

대한한공 부기장인 민경일(34)씨가 지난 달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조혈모세포를 채집하고 있다. 사진 민경일씨 제공

유전자 상세검사와 건강검진 등의 과정을 거친 뒤 대학병원에 입원해 조혈모세포를 채집할 때까지 꼬박 한 달 넘게 걸렸다. 직업 특성상 민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험을 고려해 2주간 자가격리 했다. 민씨는 해당 환자와 유전자가 모두 일치한 마지막 희망자였지만 정작 관련 기관인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은 그가 이처럼 장시간 업무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점 때문에 우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가 “사람 살리는 일”이라며 적극 의지를 보였고 회사에서도 이런 민씨 뜻에 그의 비행 일정을 조정해 줬다.

조혈모세포 기증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 크다. 질병관리청이 지난해 8월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 조사에서 조혈모세포를 기증할 생각이 없는 이유를 묻자 ‘막연한 두려움’이 40.9%로 가장 컸다. 최근에는 헌혈 같은 방식으로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는데 과거에만 해도 골반에서 골수를 추출했기 때문에 ‘골수 이식’ 이미지의 영향으로 보인다.

민씨는 “작은 실천으로 수여자에 새 삶을 선물하게 돼 뿌듯하고 감사하다”며 “통상 800년 동안 사용할 조혈모세포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이 필요한 환자에 새로운 삶을 선물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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