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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2만㎞ 순례했고, 아들은 어머니를 찍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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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혁재 기자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영화 카일라스 가는 길의 감독 정형민 씨와 주연 이춘숙 씨

영화 카일라스 가는 길의 감독 정형민 씨와 주연 이춘숙 씨

1934년생 어머니(이춘숙)는 아들이 인류학자가 되길 바랐다.
서른여섯에 낳은 아들이었다.
아들(정형민)은 캐나다 맥마스터대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정약용 후예다운 인류학자가 되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농촌 부흥을 꿈꿨던 공무원 시절의 이춘숙씨/ 사진 영화사 진진

농촌 부흥을 꿈꿨던 공무원 시절의 이춘숙씨/ 사진 영화사 진진

오래전 서부 경남에서 이춘숙을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의 어머니였다.
진주여고, 수도여자사범대학을 나와 12대 1 경쟁을 뚫고
농사교도소(지금의 농업기술센터) 초대 여성 공무원이 된 터였다.
중학교 때부터 문맹 퇴치를 위해 마을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농촌 부흥을 꿈꿨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공무원을 그만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들은 9·11테러를 보며 학문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업을 그만두고 2011년 처음 간 히말라야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세상 오지의 삶과 문화를 다큐멘터리로 소개하는 영화감독이 됐다.
2014년 어머니와 아들은 히말라야 순례 여정에 올랐다.
일찍 떠난 아버지에 대한 아픔을 어머니가 씻길 바라는 아들의 바람으로 비롯되었다.

2017년 모자는 바이칼 호수, 고비 사막, 파미르 고원,
티베트 성산 카일라스, 히말라야, 네팔 카트만두까지 오지 순례했다.
장장 2만㎞, 어머니는 순례했고 아들은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 여정이 ‘카일라스 가는 길’이라는 영화가 됐다.

이춘숙씨와 아들 정형민 감독이 2017년 티베트 성산 카일라스에서 찍은 기념 사진. /사진 영화사 진진

이춘숙씨와 아들 정형민 감독이 2017년 티베트 성산 카일라스에서 찍은 기념 사진. /사진 영화사 진진

아들은 “그저 어머니 손 잡고 오래도록 걷고 싶어 여행을 떠났노라”고 했다.
어머니는 "영화 잘 되어 오지 사람들 좋은 물이라도 묵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머니 요즘도 매달 20만~30만원씩 빠짐없이 모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쌀과 담요를 나눠주기 위해서다.
아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꿈, ‘세상을 돕고 살라’는 꿈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아들의 꿈을 위해 당신의 꿈을 접었던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 꿈을 이루겠노라는 게다.

평생 서로를 바라보며 산 어머니와 아들, 그들이 함께 만든 영화가 〈카일라스 가는 길〉이다.

평생 서로를 바라보며 산 어머니와 아들, 그들이 함께 만든 영화가 〈카일라스 가는 길〉이다.

어머니는 "나는 세상에서 젤 행복한 할망구입니더”라며 영화에서 말했다.
험난한 2만㎞ 여정, 서로의 꿈과 함께했기에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을 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