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 부모님은 자녀에 대한 불간섭주의로 일관했지만, 딱 한 번 대학입시를 앞두고서는 전공선택에 관여했었다. “남자와는 경쟁하지 말아라.” 아버지의 충고는 이것 하나였다. 그리고 여성으로 성취할 수 있는 분야로 사범대를 권하셨다. 자라면서 ‘공부하라’는 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시의 이 충고는 심금을 울렸고, 그래서 별 저항 없이 그에 따랐다.
자녀 위해 사회적 지위 남용하는 #사회지도층 부모들의 반칙 행위 #사회 정의와 공정 해치는 동시에 #자녀에게도 찬스 아닌 악몽으로
그러다 내가 언론사에 들어와 사건기자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네가 원했던 전공을 하라고 할 걸 그랬다”고 했다. 당신의 시대 기준으로는 온당한 충고였으나 시대는 바뀌고, 자녀도 각자의 성향에 따라 부모로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 인생을 산다는 데 대한 후회로 들렸다. 이 경험. 내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이었던 부모님의 관여마저도 크게 유용하지 않았던 기억은, 그래도 내겐 산 교훈으로 남았다. 자식은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자식은 부모와는 다른 시대,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
요즘 권력의 중심부에선 ‘아빠 찬스’ ‘엄마 찬스’ 논란이 불거졌다. 이를 보노라면, 사건 그 자체보다도 다른 여러 가닥의 생각들이 복잡하게 엉킨다. 가장 큰 가닥은 결코 뜻대로 안 될 일에 서로 족쇄가 되어버린 부모-자녀의 관계 혹은 가족애에 관한 것이다.
자녀의 학업과 군대 문제에 대리전을 치르는 부모들. 비단 조국 전 장관이나 추미애 장관만의 얘기는 아니다. 자녀를 대학이나 특수 대학원에 보내기 위해 스펙을 조작한 행위로 일에서 물러나거나 옥고를 치르는 엘리트 부모들도 수두룩하다. 우리에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으로 거의 대통령 당선 직전에 고배를 마셨던 대통령 후보의 기억도 있다.
형사 문제까지 일으키진 않아도 지금 자녀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부모들은 여러 곳에서 불협화음을 낸다. 대학, 대학원, 기업 등 젊은이들이 있는 조직엔 엄마·아빠 담당자를 따로 두어야 할 지경이란다. 부모는 자녀를 대신해 온갖 민원을 처리한다. ‘아이가 아파서 회사에 못 나간다.’ ‘○○이 우리 아이를 괴롭히니 잘라라.’ ‘구내식당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
‘내 자식 지상주의’ ‘내 자녀 이기주의’는 거의 이 시대 문화현상으로 봐야 할 지경이다. 일각에선 애느님, 아느님, 딸느님이라는 말도 나온다. 자녀들을 하느님처럼 절대 맹신하는 ‘자식광신도’들이 넘치는 시대. 한때 조국 전 장관의 딸 스펙 조작 의혹으로 엄마가 구속되는 사태에 사회적 격분이 일어나는 한편에선 “엄마가 그 정도도 안 하느냐”는 소위 ‘강남 엄마’로 통칭하는 극성 부모들의 한탄도 나왔다.
자녀는 맹렬한 부모의 약점이 되고, 부모는 자녀의 약점이 되어버린 현장은 쉽게 발견된다. 이미 정치권에선 자녀들이 재산 문제와 함께 주요 공격 포인트가 됐다. 상대 견제용으로 일단 자녀부터 들고 판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파면 나온다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이들 힘 있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남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사회지도층에 기대되는 절제나 신독(愼獨), 자녀를 바른 사람 혹은 자립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인내심은 보이지 않는다.
부모 잘 만나 잘못되는 그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도 또 하나의 가닥을 이룬다. 자신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을 받는 부모, 심지어 법적 처벌을 받는 부모를 보아야 하는 자녀의 심정은 어떨까. 평생 부모의 권위 남용으로 득을 본 인물로 낙인찍힌 그들의 인생은 무탈하고 평안할까. 부모의 심정으로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가 ‘내 자식 이기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가 공정사회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하게 된다. 사실 계급의 재생산은 고질적 사회현상이다. 그러잖아도 부모의 사회·경제적 계급은 그 자체로 자녀에겐 원천적 자산이다. 우월한 계급의 부모는 물질적 자산과 문화 자본을 자녀에게 투입해 출발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차이는 교육을 통해 강화되고, 사회적 지위는 자녀에게 대물림된다. 굳이 스펙 조작까지 하며 업고 뛰지 않아도 엘리트 계급 부모의 자녀들은 이미 우월한 자산을 타고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계급이 콘크리트화하지 않도록 교육을 통해 출발선의 차이를 극복하고, 계급재생산 구조를 해체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야 한다. 이는 교육사회학의 오랜 과제이기도 하고,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기초 단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제에서 우리는 성공적인 해답을 찾은 적이 없다. 여기엔 반칙을 일삼는 엘리트 부모의 존재가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작금의 부모 찬스에 대한 경계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이 장애물을 걷어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이 좋은 기회를 분노와 분열, 정쟁으로만 소모해선 안 된다.
또 이참에 자녀들도 각성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기대도 있다. 그들을 위한다며 편법을 권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좌우하려는 부모를 거부하고 자립하는 것. 세상은 시시각각 변한다. 부모 시대의 선의가 자신이 살아야 할 세상에선 무용지물이나 걸림돌이 되는 예는 허다하다. 부모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소리에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어차피 내 인생이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